`연료전지차 연구 주역` 임태훈 KIST 부원장
■ `My Hero` 사이언티스트
과학자는 연구실에서 연구노트나 실험장비만 들여다보고 있는 이들이 아니다. 꿈과 열정을 불사르면서 인류 문명의 새 길을 뚫고, 한 국가의 운명을 바꿔놓는 이들이다. 뛰어난 연구성과는 과거에 없던 산업을 만들고 세계인에게 더 편안하고 건강한 삶을 열어준다. 과학자의 삶 속에는 열정과 팀워크, 사명감이 함께 녹아들어 있다. 미래 세대에 롤모델이 되는 동시에 우리가 숨쉬는 현실을 바꿔놓은 과학자들을 만나 그들의 삶과 연구 이야기를 들었다.
글로벌 기업들이 치열한 진검승부를 벌이는 자동차 산업에서 국산 자동차가 `세계 최초' 타이틀을 따낸 일이 딱 한번 있다. 역사적인 사건은 바로 현대자동차의 세계 첫 수소연료전지차 양산이다. 연료전지차 개발에 선진국보다 늦게 뛰어든 현대차의 첫 양산 소식은 글로벌 자동차 업계에 충격이었다. 현대차는 다른 기업들이 하지 못한 이 일을 해내고 최근 유럽과 미국시장으로의 수출에도 성공했다.
현대차의 위업 뒤에는 연료전지 한 분야를 25년간 파고든 한 과학자의 열정과 집념이 있었다. 임태훈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부원장이 그 주인공.
연료전지 분야 한국 대표 과학자 중 한명인 그는 1998년 현대차가 연료전지차 연구를 시작할 때 첫 단추를 꾄 후 오늘까지 함께 역사를 만들어온 인물이다. 이렇게 시작된 두 기관의 인연은 놀랍게도 15년간 끈질기게 이어져 왔다.
임 부원장은 특유의 강력한 카리스마와 팀원들을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으로 KIST 연료전지연구센터가 20여년간 다른 어떤 연구조직보다 치열하게 머리를 맞대고 한몸같이 뭉치도록 조직력을 만들어냈다.
`따뜻함'과 `카리스마'라는 양면을 함께 갖고 있는 그를 두고 초등학교 시절부터 절친인 여준구 전 항공대 총장은 "자기 것을 챙기기보다 주변사람을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과 인간성, 카리스마를 함께 가진 존경하는 친구"라고 평했다. 반면 문길주 KIST 전 원장은 강한 리더십을 빗대 농담조로 `조폭' `특전사' `깡패'라고 불렀다. KIST 내부에선 `그 누구보다 전략적 판단력과 집중력이 뛰어난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다.
본인을 부각시키기보단 모든 게 팀의 힘이었다고 말하는 그는 인터뷰에서도 말을 아꼈다. KIST 부원장실과 며칠 후 저녁식사 자리에서 두 번 만나 얘기를 들었다.
인터뷰 = 안경애 생활과학부장
- 어린 시절의 꿈을 이뤘나. 꿈의 어디까지를 이뤘나.
"어렸을 땐 과학자가 뭔지도 모르고 그 꿈을 꾼 것 같다. 누구나 어릴 적 대통령이나 장군, 과학자의 꿈을 한번씩 꾸는 것 아닌가. 그런데 한번도 대통령이나 장군을 꿈꾸지는 않은 것 같다. 어른들이 아인슈타인 같은 과학자 얘기를 하는 걸 듣고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키웠다. 삶을 돌아보면 꿈을 100% 가깝게 이룬 것 같다. 다만 가족들에게 그리 좋은 남편, 아빠는 아니었던 것 같아서 아쉽다."
- 학창시절은 어땠나.
"모범생이었다. 얌전한 편이어서 고등학교 친구들은 지금의 나를 보면 헷갈려하는 이들이 많다. 그렇다고 공부만 한 건 아니다. 친구들과 축구를 즐겼는데, 버스표나 빵 내기 축구를 하는 게 유일한 일탈이었던 것 같다. 논 건 그게 전부다.
좋고 싫음이 분명한 좀 까칠한 성격인데, 고등학교 입학시험에 한번, 대학 입시에 한번 떨어져 재수를 하면서 오만함이 꺾이고 성격도 바뀐 것 같다. 좋고 싫음이 분명하기도 하지만, 한번 좋아한 것은 끝까지 즐기며 하는 스타일이다."
- 연료전지와의 첫 인연이 궁금하다.
"87년 KIST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연료전지를 연구하게 될 줄은 몰랐다. 연료전지라는 용어를 처음 접한 게 대학 4학년 때 어느 세미나에서였다. 당시 내용은 생각나지 않는데 세미나를 주관한 교수가 연료전지는 백금을 쓰는데 그게 너무 비싸서 사용량을 줄이거나 대체재료를 개발하지 않으면 상용화가 힘들 것이라는 얘기를 한 게 기억이 난다. 1980년의 일이다.
89년 5월 박원훈 전 원장이 당시 내 보스였던 홍성안 박사에게 연료전지 연구 검토를 지시해서 함께 공부를 한 게 시작이었다. 접하는 것마다 모르는 말이었는데, 용어부터 하나씩 공부하고, 우리보다 10년 이상 앞서있던 일본의 현장을 일주일간 방문해 익혀나갔다."
- 처음부터 선진국과의 격차가 컸던 것 같은데.
"일본만 해도 1980년대 초에 시작해 우리보다 10년 정도 앞서있었고, 미국과 러시아(구소련)는 훨씬 역사가 길었다. 수소와 산소가 작용해 전기와 물을 만든다는 연료전지 이론은 1840년께 발견됐는데 본격적인 연구는 우주개발을 하면서 이뤄졌다. 부피와 무게가 작으면서 유인우주선에서 필요한 전기에다 물까지 내놓는 연료전지를 미국과 구소련이 유인우주선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1960∼70년대에 연구를 시작한 미국은 콜롬비아, 제미니, 아폴로 등에 연료전지를 썼다. 구소련도 마찬가지다."
- 본격적인 연구는 어떻게 시작했나.
"1988년 대체에너지법이 제정되면서 대체에너지 개발이 시작됐는데 그 즈음 우리 연구도 시작된 거다. 그러다 1993년 정부가 시작한 대형 R&D 사업인 `G7 프로젝트'에 연료전지가 포함되면서 연구비가 커졌다. 그 과제 책임자가 내 보스였던 홍성안 박사였다. 그 즈음 남석우, 오인환 박사도 조인해 호흡을 맞췄다.
2003년에는 산자부가 수소연료전지사업단을 만든 게 또 다른 전기가 됐다. 홍성안 박사가 이 과제도 단장으로 선출됐다. 연료전지에 대한 집중적 투자가 이뤄진 시기였다. 정부 뒷받침과 기업의 노력, 출연연과 대학 연구자들의 땀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세계 최초 연료전지차 양산이라는 성과로 이어질 수 있었다."
- 실패나 좌절의 경험은 없었나. 있었다면 어떻게 극복했나.
"98년 IMF 당시 사업 빅딜이 이뤄지면서 연료전지 연구를 하던 기업간 M&A가 이뤄지면서 인수기업이 연구를 중단해 어려움이 많았다. 산자부 과제는 기업 참여가 필수인데 주 투자기업이 빠진 것이다. 다행히 산자부가 10여년 투자와 IMF라는 특이한 상황을 감안해 1년 정도 유예기간을 줬다. 이후 2001년 포스코가 연구에 참여해 문제가 해결됐다."
- 가장 인상적인 만남, 잊지 못할 인연을 꼽는다면.
"너무나 좋고 훌륭한 동료들을 만나 함께 연구하면서 연구자로서 정말 행복했다. 사실 KIST 같은 출연연은 당시 이직률이 상당히 높았다. 출연연보다 자유롭고 정년이 긴 대학으로 많이 떠났다. 그런데 우리 팀은 초기 멤버인 홍성안, 남석우, 오인환, 윤성필, 한종희, 조은애 박사 등 다들 대학에 갈 만한 훌륭한 프로필을 갖고 있는데 팀을 떠나지 않았다. 연료전지연구팀이 생긴 후 20년 가까이 핵심멤버 10여명이 한 명도 나가지 않고 마음을 맞춰 연구를 했다.
출연연의 문제가 연구자들이 마치 개인사업자같이 각자 연구과제를 따와서 연구한다는 점인데 우린 그야말로 팀으로 연구를 했고 그래서 행복했다. 일 하는데 누가 혼자 다 했다는 것은 없는 것 같다. 그런 마음을 먹으면 팀을 이루기 힘들다.
우리나라에서 한 분야 연구를 몇십년 하기 힘든데 20년 넘게 할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다."
임 부원장은 딸도 연세대 대학원 박사과정에서 연료전지를 전공하고 있다. `연료전지 가족'인 셈이다. 매주 주말이면 찾아뵙는 모친도 연료전지 지지자가 됐다.
- 현대차와의 공동연구는 언제 시작됐나.
"96∼97년께 IMF 직전 자동차용 연료전지가 갑자기 부각됐다. 당시 현대차에서 장기 연구 의지를 갖고 투자를 시작하면서 협력 논의가 시작돼 98년부터 본격적으로 공동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그 후 KIST는 현대차와의 협력을 기반으로 자동차용 연료전지에 집중했고 지금까지 협력을 이어오고 있다."
- 지금까지 연구 인생에서 사건ㆍ사고나 에피소드는 없었나.
"하도 많아서….(웃음) 참 한가지 생각나는 건 홍성안 박사가 2003년말 수소연료전지사업단장에 출전했을 때 일이다. 4개 기관이 경쟁했는데, 사전 발표연습을 하지 않고 현장에서 부딪히겠다는 홍 박사를 설득해 연구자들을 불러 발표 리허설을 하도록 했다. 홍 박사의 발표 후 연구자들에게 평을 하라고 했더니 선배 연구자의 발표에 아무도 말을 못 꺼내더라. 그래서 계급장 떼고 솔직히 말하라고 했더니 홍 박사보다 3년 후배인 안 모 박사가 `그 따위로 할 거면 때려 치워라'고 쓴 소리를 하더라.
그래서 2주간 준비한 100여장 되는 발표자료를 내가 다 버렸다. 그리고 초까지 재가며 발표 준비를 시켰다. 홍 박사가 당시 `너가 다음에 나가면 10배로 갚아주겠다'고 이를 갈았다. 그 후 그는 사업단장이 됐다. 그런 일에는 계급장에 연연하면 안 된다고 본다. 계급장이 필요한 일과 아닌 일을 구분하는 편이다."
- 연구에 가장 중요한 덕목은 뭔가.
"`열정'이다. 스스로 샘솟는 열정도 있고 판을 잘 깔아줘서 신이 나서 생기는 열정도 있다. 사람들이 스스로 열정이 생겨서 일에 몰두하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신입직원을 뽑을 때도 아무런 느낌 없이 발표하는 이를 보면 가장 답답하다. 출연연이 대학교수와 차별화해 대규모 연구를 하려면 열정을 끌어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구체적으로 어떻게 끌어내야 하나.
"술로….(웃음) 옛날엔 그랬는데 요즘은 그런 것 같지가 않다."
- 이끄는 연구조직이 잘 뭉치기로 소문났다. 체육대회 등 각종 연구원 내 대회에서 1등만 한다는데.
"안 믿을지 모르지만 내가 젊었을 때 축구, 배구, 소프트볼 본부 대표선수였다. 관심을 보여주고 적극 나서서 응원해주고 마음 편하게 운동하게 해주는 게 비결이라면 비결이다. 연구원 체육대회라면 종목이 뻔하다. 축구, 농구, 여자족구, 피구, 테니스 정도인데 구기종목은 약 한달간 예선전을 미리 거쳐 체육대회 날은 결승전만 한다. 가능한 한 직접 가서 응원하고 격려하고, 경기 후 함께 짜장면이라도 시켜먹으면서 스킨십을 나누는 게 그들에게 힘이 되는 것 같다. 엔지니어링도 사랑과 관심을 먹고 크듯이 모든 게 같은 것 같다."
- 연료전지 분야에서 KIST의 역할은 어떻게 변화하고 있나.
"출연연은 기업이 관심을 보이기 전 미래형 기술을 미리 선점해 적절한 시점에 기업에 넘겨주는 것과 함께 산업계에 필요한 인재를 기르는 역할이 중요하다고 본다. 연료전지에서 그렇게 했고, 30∼40명이 현대차, 포스코, 모비스, 삼성 등 기업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
연구에서는 2008년 이전과 이후 역할이 많이 바뀌었다. 이전엔 우리가 시스템까지 만들어 보여주는 연구를 했지만 이후엔 공정규모를 키우는 일을 기업이 훨씬 잘 하기 시작했다. 이후 우리는 오히려 기본으로 돌아가서 5∼6년 되는 전지 수명을 10년까지 늘리고, 비싼 재료를 싼 것으로 대체하는 기초연구로 돌아갔다. 앞으로도 상용화의 기반이 되는 원천연구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 연구분야에서 기술 진화가 필요한 부분은 무엇인가.
"지금도 다른 기술과 경쟁하기엔 가격이 비싼데 정부보조금 제도에 의해 시장이 열리고 있다. 1980년에 들었던 `너무 비싸서 안 돼'라는 말이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 적용되는 셈이다. 그래서 KIST 연료전지센터는 수명을 늘리고 가격을 낮추는 연구를 계속 하고 있다. 현재 센터에는 정규직 연구원 16명을 포함해 총 70여명이 몸담고 연구를 하고 있다.
현재 갖고 있는 경제성과 내구성 문제는 2020년까진 해결될 것으로 본다. 자동차에서 더 큰 문제는 수소충전소 구축이다. 그와 연관해 사회제도를 갖추고 님비현상을 극복하는 게 가장 큰 도전과제라고 본다. 일본, 미국, 유럽은 이미 국가와 기업이 로드맵을 세워 차근차근 진행하는 데 우리나라는 뒤떨어져 있다.
또 발전형 연료전지는 근본적으로 에너지 시장이 정상화돼야 자리잡을 수 있다. 전기값이 비정상적으로 낮은 문제를 개선해야 에너지 절약도 일어날 수 있다.
연료전지는 어느 기업이나 연구소가 단독으로 할 수 없는, 국가적으로 키워야 하는 산업이다. 생태계 가치사슬을 갖추고 상생구조를 만드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안경애기자 naturean@
사진 =유동일기자 eddieyou
■ 임태훈 부원장은…
임태훈 부원장은 세계 최초 수소연료전지차 양산의 숨은 기술개발 주역이다. 57년생인 그는 서울대 공업화학과를 졸업하고 뉴욕주립대에서 화학공학 석ㆍ박사 학위를 받은 후 87년부터 27년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서 몸담았다.
1989년부터 연료전지 연구를 시작해 연료전지센터장, 국가기반기술연구본부장을 지냈으며 지난 3월부터 부원장직을 수행하고 있다. 산업자원부 장관상(2005), 대통령 표창(2007), 기초기술연구회 우수기관고유과제상(2008), 이탈리아 정부 훈장(2012) 등을 받았다.
과학자는 연구실에서 연구노트나 실험장비만 들여다보고 있는 이들이 아니다. 꿈과 열정을 불사르면서 인류 문명의 새 길을 뚫고, 한 국가의 운명을 바꿔놓는 이들이다. 뛰어난 연구성과는 과거에 없던 산업을 만들고 세계인에게 더 편안하고 건강한 삶을 열어준다. 과학자의 삶 속에는 열정과 팀워크, 사명감이 함께 녹아들어 있다. 미래 세대에 롤모델이 되는 동시에 우리가 숨쉬는 현실을 바꿔놓은 과학자들을 만나 그들의 삶과 연구 이야기를 들었다.
글로벌 기업들이 치열한 진검승부를 벌이는 자동차 산업에서 국산 자동차가 `세계 최초' 타이틀을 따낸 일이 딱 한번 있다. 역사적인 사건은 바로 현대자동차의 세계 첫 수소연료전지차 양산이다. 연료전지차 개발에 선진국보다 늦게 뛰어든 현대차의 첫 양산 소식은 글로벌 자동차 업계에 충격이었다. 현대차는 다른 기업들이 하지 못한 이 일을 해내고 최근 유럽과 미국시장으로의 수출에도 성공했다.
현대차의 위업 뒤에는 연료전지 한 분야를 25년간 파고든 한 과학자의 열정과 집념이 있었다. 임태훈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부원장이 그 주인공.
연료전지 분야 한국 대표 과학자 중 한명인 그는 1998년 현대차가 연료전지차 연구를 시작할 때 첫 단추를 꾄 후 오늘까지 함께 역사를 만들어온 인물이다. 이렇게 시작된 두 기관의 인연은 놀랍게도 15년간 끈질기게 이어져 왔다.
임 부원장은 특유의 강력한 카리스마와 팀원들을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으로 KIST 연료전지연구센터가 20여년간 다른 어떤 연구조직보다 치열하게 머리를 맞대고 한몸같이 뭉치도록 조직력을 만들어냈다.
`따뜻함'과 `카리스마'라는 양면을 함께 갖고 있는 그를 두고 초등학교 시절부터 절친인 여준구 전 항공대 총장은 "자기 것을 챙기기보다 주변사람을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과 인간성, 카리스마를 함께 가진 존경하는 친구"라고 평했다. 반면 문길주 KIST 전 원장은 강한 리더십을 빗대 농담조로 `조폭' `특전사' `깡패'라고 불렀다. KIST 내부에선 `그 누구보다 전략적 판단력과 집중력이 뛰어난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다.
본인을 부각시키기보단 모든 게 팀의 힘이었다고 말하는 그는 인터뷰에서도 말을 아꼈다. KIST 부원장실과 며칠 후 저녁식사 자리에서 두 번 만나 얘기를 들었다.
인터뷰 = 안경애 생활과학부장
- 어린 시절의 꿈을 이뤘나. 꿈의 어디까지를 이뤘나.
"어렸을 땐 과학자가 뭔지도 모르고 그 꿈을 꾼 것 같다. 누구나 어릴 적 대통령이나 장군, 과학자의 꿈을 한번씩 꾸는 것 아닌가. 그런데 한번도 대통령이나 장군을 꿈꾸지는 않은 것 같다. 어른들이 아인슈타인 같은 과학자 얘기를 하는 걸 듣고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키웠다. 삶을 돌아보면 꿈을 100% 가깝게 이룬 것 같다. 다만 가족들에게 그리 좋은 남편, 아빠는 아니었던 것 같아서 아쉽다."
- 학창시절은 어땠나.
"모범생이었다. 얌전한 편이어서 고등학교 친구들은 지금의 나를 보면 헷갈려하는 이들이 많다. 그렇다고 공부만 한 건 아니다. 친구들과 축구를 즐겼는데, 버스표나 빵 내기 축구를 하는 게 유일한 일탈이었던 것 같다. 논 건 그게 전부다.
좋고 싫음이 분명한 좀 까칠한 성격인데, 고등학교 입학시험에 한번, 대학 입시에 한번 떨어져 재수를 하면서 오만함이 꺾이고 성격도 바뀐 것 같다. 좋고 싫음이 분명하기도 하지만, 한번 좋아한 것은 끝까지 즐기며 하는 스타일이다."
- 연료전지와의 첫 인연이 궁금하다.
"87년 KIST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연료전지를 연구하게 될 줄은 몰랐다. 연료전지라는 용어를 처음 접한 게 대학 4학년 때 어느 세미나에서였다. 당시 내용은 생각나지 않는데 세미나를 주관한 교수가 연료전지는 백금을 쓰는데 그게 너무 비싸서 사용량을 줄이거나 대체재료를 개발하지 않으면 상용화가 힘들 것이라는 얘기를 한 게 기억이 난다. 1980년의 일이다.
89년 5월 박원훈 전 원장이 당시 내 보스였던 홍성안 박사에게 연료전지 연구 검토를 지시해서 함께 공부를 한 게 시작이었다. 접하는 것마다 모르는 말이었는데, 용어부터 하나씩 공부하고, 우리보다 10년 이상 앞서있던 일본의 현장을 일주일간 방문해 익혀나갔다."
- 처음부터 선진국과의 격차가 컸던 것 같은데.
"일본만 해도 1980년대 초에 시작해 우리보다 10년 정도 앞서있었고, 미국과 러시아(구소련)는 훨씬 역사가 길었다. 수소와 산소가 작용해 전기와 물을 만든다는 연료전지 이론은 1840년께 발견됐는데 본격적인 연구는 우주개발을 하면서 이뤄졌다. 부피와 무게가 작으면서 유인우주선에서 필요한 전기에다 물까지 내놓는 연료전지를 미국과 구소련이 유인우주선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1960∼70년대에 연구를 시작한 미국은 콜롬비아, 제미니, 아폴로 등에 연료전지를 썼다. 구소련도 마찬가지다."
- 본격적인 연구는 어떻게 시작했나.
"1988년 대체에너지법이 제정되면서 대체에너지 개발이 시작됐는데 그 즈음 우리 연구도 시작된 거다. 그러다 1993년 정부가 시작한 대형 R&D 사업인 `G7 프로젝트'에 연료전지가 포함되면서 연구비가 커졌다. 그 과제 책임자가 내 보스였던 홍성안 박사였다. 그 즈음 남석우, 오인환 박사도 조인해 호흡을 맞췄다.
2003년에는 산자부가 수소연료전지사업단을 만든 게 또 다른 전기가 됐다. 홍성안 박사가 이 과제도 단장으로 선출됐다. 연료전지에 대한 집중적 투자가 이뤄진 시기였다. 정부 뒷받침과 기업의 노력, 출연연과 대학 연구자들의 땀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세계 최초 연료전지차 양산이라는 성과로 이어질 수 있었다."
- 실패나 좌절의 경험은 없었나. 있었다면 어떻게 극복했나.
"98년 IMF 당시 사업 빅딜이 이뤄지면서 연료전지 연구를 하던 기업간 M&A가 이뤄지면서 인수기업이 연구를 중단해 어려움이 많았다. 산자부 과제는 기업 참여가 필수인데 주 투자기업이 빠진 것이다. 다행히 산자부가 10여년 투자와 IMF라는 특이한 상황을 감안해 1년 정도 유예기간을 줬다. 이후 2001년 포스코가 연구에 참여해 문제가 해결됐다."
- 가장 인상적인 만남, 잊지 못할 인연을 꼽는다면.
"너무나 좋고 훌륭한 동료들을 만나 함께 연구하면서 연구자로서 정말 행복했다. 사실 KIST 같은 출연연은 당시 이직률이 상당히 높았다. 출연연보다 자유롭고 정년이 긴 대학으로 많이 떠났다. 그런데 우리 팀은 초기 멤버인 홍성안, 남석우, 오인환, 윤성필, 한종희, 조은애 박사 등 다들 대학에 갈 만한 훌륭한 프로필을 갖고 있는데 팀을 떠나지 않았다. 연료전지연구팀이 생긴 후 20년 가까이 핵심멤버 10여명이 한 명도 나가지 않고 마음을 맞춰 연구를 했다.
출연연의 문제가 연구자들이 마치 개인사업자같이 각자 연구과제를 따와서 연구한다는 점인데 우린 그야말로 팀으로 연구를 했고 그래서 행복했다. 일 하는데 누가 혼자 다 했다는 것은 없는 것 같다. 그런 마음을 먹으면 팀을 이루기 힘들다.
우리나라에서 한 분야 연구를 몇십년 하기 힘든데 20년 넘게 할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다."
임 부원장은 딸도 연세대 대학원 박사과정에서 연료전지를 전공하고 있다. `연료전지 가족'인 셈이다. 매주 주말이면 찾아뵙는 모친도 연료전지 지지자가 됐다.
- 현대차와의 공동연구는 언제 시작됐나.
"96∼97년께 IMF 직전 자동차용 연료전지가 갑자기 부각됐다. 당시 현대차에서 장기 연구 의지를 갖고 투자를 시작하면서 협력 논의가 시작돼 98년부터 본격적으로 공동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그 후 KIST는 현대차와의 협력을 기반으로 자동차용 연료전지에 집중했고 지금까지 협력을 이어오고 있다."
- 지금까지 연구 인생에서 사건ㆍ사고나 에피소드는 없었나.
"하도 많아서….(웃음) 참 한가지 생각나는 건 홍성안 박사가 2003년말 수소연료전지사업단장에 출전했을 때 일이다. 4개 기관이 경쟁했는데, 사전 발표연습을 하지 않고 현장에서 부딪히겠다는 홍 박사를 설득해 연구자들을 불러 발표 리허설을 하도록 했다. 홍 박사의 발표 후 연구자들에게 평을 하라고 했더니 선배 연구자의 발표에 아무도 말을 못 꺼내더라. 그래서 계급장 떼고 솔직히 말하라고 했더니 홍 박사보다 3년 후배인 안 모 박사가 `그 따위로 할 거면 때려 치워라'고 쓴 소리를 하더라.
그래서 2주간 준비한 100여장 되는 발표자료를 내가 다 버렸다. 그리고 초까지 재가며 발표 준비를 시켰다. 홍 박사가 당시 `너가 다음에 나가면 10배로 갚아주겠다'고 이를 갈았다. 그 후 그는 사업단장이 됐다. 그런 일에는 계급장에 연연하면 안 된다고 본다. 계급장이 필요한 일과 아닌 일을 구분하는 편이다."
- 연구에 가장 중요한 덕목은 뭔가.
"`열정'이다. 스스로 샘솟는 열정도 있고 판을 잘 깔아줘서 신이 나서 생기는 열정도 있다. 사람들이 스스로 열정이 생겨서 일에 몰두하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신입직원을 뽑을 때도 아무런 느낌 없이 발표하는 이를 보면 가장 답답하다. 출연연이 대학교수와 차별화해 대규모 연구를 하려면 열정을 끌어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구체적으로 어떻게 끌어내야 하나.
"술로….(웃음) 옛날엔 그랬는데 요즘은 그런 것 같지가 않다."
- 이끄는 연구조직이 잘 뭉치기로 소문났다. 체육대회 등 각종 연구원 내 대회에서 1등만 한다는데.
"안 믿을지 모르지만 내가 젊었을 때 축구, 배구, 소프트볼 본부 대표선수였다. 관심을 보여주고 적극 나서서 응원해주고 마음 편하게 운동하게 해주는 게 비결이라면 비결이다. 연구원 체육대회라면 종목이 뻔하다. 축구, 농구, 여자족구, 피구, 테니스 정도인데 구기종목은 약 한달간 예선전을 미리 거쳐 체육대회 날은 결승전만 한다. 가능한 한 직접 가서 응원하고 격려하고, 경기 후 함께 짜장면이라도 시켜먹으면서 스킨십을 나누는 게 그들에게 힘이 되는 것 같다. 엔지니어링도 사랑과 관심을 먹고 크듯이 모든 게 같은 것 같다."
- 연료전지 분야에서 KIST의 역할은 어떻게 변화하고 있나.
"출연연은 기업이 관심을 보이기 전 미래형 기술을 미리 선점해 적절한 시점에 기업에 넘겨주는 것과 함께 산업계에 필요한 인재를 기르는 역할이 중요하다고 본다. 연료전지에서 그렇게 했고, 30∼40명이 현대차, 포스코, 모비스, 삼성 등 기업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
연구에서는 2008년 이전과 이후 역할이 많이 바뀌었다. 이전엔 우리가 시스템까지 만들어 보여주는 연구를 했지만 이후엔 공정규모를 키우는 일을 기업이 훨씬 잘 하기 시작했다. 이후 우리는 오히려 기본으로 돌아가서 5∼6년 되는 전지 수명을 10년까지 늘리고, 비싼 재료를 싼 것으로 대체하는 기초연구로 돌아갔다. 앞으로도 상용화의 기반이 되는 원천연구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 연구분야에서 기술 진화가 필요한 부분은 무엇인가.
"지금도 다른 기술과 경쟁하기엔 가격이 비싼데 정부보조금 제도에 의해 시장이 열리고 있다. 1980년에 들었던 `너무 비싸서 안 돼'라는 말이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 적용되는 셈이다. 그래서 KIST 연료전지센터는 수명을 늘리고 가격을 낮추는 연구를 계속 하고 있다. 현재 센터에는 정규직 연구원 16명을 포함해 총 70여명이 몸담고 연구를 하고 있다.
현재 갖고 있는 경제성과 내구성 문제는 2020년까진 해결될 것으로 본다. 자동차에서 더 큰 문제는 수소충전소 구축이다. 그와 연관해 사회제도를 갖추고 님비현상을 극복하는 게 가장 큰 도전과제라고 본다. 일본, 미국, 유럽은 이미 국가와 기업이 로드맵을 세워 차근차근 진행하는 데 우리나라는 뒤떨어져 있다.
또 발전형 연료전지는 근본적으로 에너지 시장이 정상화돼야 자리잡을 수 있다. 전기값이 비정상적으로 낮은 문제를 개선해야 에너지 절약도 일어날 수 있다.
연료전지는 어느 기업이나 연구소가 단독으로 할 수 없는, 국가적으로 키워야 하는 산업이다. 생태계 가치사슬을 갖추고 상생구조를 만드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안경애기자 naturean@
사진 =유동일기자 eddieyou
■ 임태훈 부원장은…
임태훈 부원장은 세계 최초 수소연료전지차 양산의 숨은 기술개발 주역이다. 57년생인 그는 서울대 공업화학과를 졸업하고 뉴욕주립대에서 화학공학 석ㆍ박사 학위를 받은 후 87년부터 27년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서 몸담았다.
1989년부터 연료전지 연구를 시작해 연료전지센터장, 국가기반기술연구본부장을 지냈으며 지난 3월부터 부원장직을 수행하고 있다. 산업자원부 장관상(2005), 대통령 표창(2007), 기초기술연구회 우수기관고유과제상(2008), 이탈리아 정부 훈장(2012)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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