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홍콩에서 열린 국제학회에 참가한 적이 있다. 유럽과 미국 그리고 동아시아의 학자들이 참가한 국제학술대회였다. 잠시 쉬는 시간에 홍콩 중문대학의 한교수가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 최근 한국학자들은 동아시아 학자들 중에서는 영어를 제일 잘하는 것 같습니다."
나는 칭찬에 약간 고무되어 응답했다.
" 한국은 영어를 잘 해야만 하는 매우 효과적 제도를 잘 구축했습니다. 특히 대학교수는 영어로 논문을 써 영미권 학술지에 게재하고 강의도 영어로 하지 않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어요."
" 아, 그래요. 그런데 한국은 역사적으로 한번이라도 학문을 모국어로 한 적이 있나요?"
나는 거기에 무엇이라고 답할 수 없다.
내가 침묵하는 사이에 그 중국학자는 말을 이었다. 걱정스러운 듯...
"학문을 할 수 없는 모국어는 문화어가 될 수 없는데...."
순간 나는 얼이 빠진 듯 말문을 잃었다. 마치 몽둥이로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그리고 예전 고등학교 시절 국사시간에 세종이 한글을 창제할 당시 최만리가 올렸다는 상소문이 기억났다.
우리의 글로는 도와 진리를 논할 수 없다는 취지의 상소문을 올렸다는 최만리.
조금 전 중국학자가 나에게 한말과 최만리의 상소문에 대한 기억이 엇갈리며 나는 엄청난 수치심을 느꼈다. 우리의 역사 속에 우리말로 된 인문학이 존재한 적이 없으며, 현재 우리의 인문학에도 우리의 얼과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언어학이나 언어철학에서는 상식이 된 사실이지만 생각에서 언어가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에서 생각이 탄생한다. 그리고 그 때 언어는 다른 언어가 아니라 바로 한 인간이 모국어로 하고 있는 그 언어이다. 모국어는 단순히 우리의 생각을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을 가능하게 하는 모태이다. 따라서 모국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외국어를 강요하면, 사실 생각의 탄생이 정지되고 증발되는 것이다. 외국어로 인문학을 해온 나, 또 이제 외국어로 인문학을 해야하는 나, 나는 결국 얼을 잃어버린 얼빠진 인문학자였다.
현재와 같은 상황이 지속된다면 얼빠진 우리 인문학이 얼을 회복할 수 있을까? 과연 한류와 정보화선진국을 자랑하는 대한민국에 진정한 우리의 인문학이 탄생할 수 있겠는가? 우리말을 잃은 인문학, 영어권 인문학을 이 땅에서 다시 영어로 하는 인문학, 그것은 미국인들 혹은 영국인들의 삶의 활동 그리고 그 삶을 성찰하는 인문학의 짝퉁일 뿐이다. 그런 인문학은 우리 삶의 바깥에서 유랑할 뿐, 이곳에서 우리말과 융화되면서 대한민국 땅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과 함께 소통하고 고민하며 인간애를 실천하면서, 그 삶의 바람직한 방향을 모색하는 살아있는 인문학은 아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그것은 이 땅의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인문학일 수 없다. 그것은 죽은 인문학이며, 우리의 인문학이 죽으면 우리말도 죽는다.
한국의 인문학은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활동임과 동시에 그 삶을 성찰하고 그들이 쓰는 말로 소통하며 그들의 삶이 인간애로 승화될 수 있는 방향을 같이 모색해야 한다. 그리고 인문학은 항상 바로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문제를 같이 고민하며 극복할 방향을 찾아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인들이 직면하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이 시대를 지탱하고 있는 체제가 더욱 극심한 경쟁을 유도하고, 그럼으로써 인간들이 서로에 대해 인간애를 상실하는 상호훼손의 범죄 상황이 전개되고 있으며, 나아가서는 자신에 대해서도 인간애를 상실한 자살로 치닫고, 결국 출산마저 기피하는 반생명적 나라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대한민국에서 인문학이 해야 할 과제는 너무나도 명확하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경쟁이라는 독약을 마시며 죽어가는 인간애를 다시 살려내는 해독제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의 인문학에 절실히 요청되는 역할은 우리말로 우리의 인문학 정립, 그리고 경쟁사회의 비인간성에 대한 해독제 역할이다.
이종관 성균관대 철학과 교수
" 최근 한국학자들은 동아시아 학자들 중에서는 영어를 제일 잘하는 것 같습니다."
나는 칭찬에 약간 고무되어 응답했다.
" 한국은 영어를 잘 해야만 하는 매우 효과적 제도를 잘 구축했습니다. 특히 대학교수는 영어로 논문을 써 영미권 학술지에 게재하고 강의도 영어로 하지 않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어요."
" 아, 그래요. 그런데 한국은 역사적으로 한번이라도 학문을 모국어로 한 적이 있나요?"
나는 거기에 무엇이라고 답할 수 없다.
내가 침묵하는 사이에 그 중국학자는 말을 이었다. 걱정스러운 듯...
"학문을 할 수 없는 모국어는 문화어가 될 수 없는데...."
순간 나는 얼이 빠진 듯 말문을 잃었다. 마치 몽둥이로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그리고 예전 고등학교 시절 국사시간에 세종이 한글을 창제할 당시 최만리가 올렸다는 상소문이 기억났다.
우리의 글로는 도와 진리를 논할 수 없다는 취지의 상소문을 올렸다는 최만리.
조금 전 중국학자가 나에게 한말과 최만리의 상소문에 대한 기억이 엇갈리며 나는 엄청난 수치심을 느꼈다. 우리의 역사 속에 우리말로 된 인문학이 존재한 적이 없으며, 현재 우리의 인문학에도 우리의 얼과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언어학이나 언어철학에서는 상식이 된 사실이지만 생각에서 언어가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에서 생각이 탄생한다. 그리고 그 때 언어는 다른 언어가 아니라 바로 한 인간이 모국어로 하고 있는 그 언어이다. 모국어는 단순히 우리의 생각을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을 가능하게 하는 모태이다. 따라서 모국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외국어를 강요하면, 사실 생각의 탄생이 정지되고 증발되는 것이다. 외국어로 인문학을 해온 나, 또 이제 외국어로 인문학을 해야하는 나, 나는 결국 얼을 잃어버린 얼빠진 인문학자였다.
현재와 같은 상황이 지속된다면 얼빠진 우리 인문학이 얼을 회복할 수 있을까? 과연 한류와 정보화선진국을 자랑하는 대한민국에 진정한 우리의 인문학이 탄생할 수 있겠는가? 우리말을 잃은 인문학, 영어권 인문학을 이 땅에서 다시 영어로 하는 인문학, 그것은 미국인들 혹은 영국인들의 삶의 활동 그리고 그 삶을 성찰하는 인문학의 짝퉁일 뿐이다. 그런 인문학은 우리 삶의 바깥에서 유랑할 뿐, 이곳에서 우리말과 융화되면서 대한민국 땅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과 함께 소통하고 고민하며 인간애를 실천하면서, 그 삶의 바람직한 방향을 모색하는 살아있는 인문학은 아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그것은 이 땅의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인문학일 수 없다. 그것은 죽은 인문학이며, 우리의 인문학이 죽으면 우리말도 죽는다.
한국의 인문학은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활동임과 동시에 그 삶을 성찰하고 그들이 쓰는 말로 소통하며 그들의 삶이 인간애로 승화될 수 있는 방향을 같이 모색해야 한다. 그리고 인문학은 항상 바로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문제를 같이 고민하며 극복할 방향을 찾아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인들이 직면하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이 시대를 지탱하고 있는 체제가 더욱 극심한 경쟁을 유도하고, 그럼으로써 인간들이 서로에 대해 인간애를 상실하는 상호훼손의 범죄 상황이 전개되고 있으며, 나아가서는 자신에 대해서도 인간애를 상실한 자살로 치닫고, 결국 출산마저 기피하는 반생명적 나라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대한민국에서 인문학이 해야 할 과제는 너무나도 명확하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경쟁이라는 독약을 마시며 죽어가는 인간애를 다시 살려내는 해독제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의 인문학에 절실히 요청되는 역할은 우리말로 우리의 인문학 정립, 그리고 경쟁사회의 비인간성에 대한 해독제 역할이다.
이종관 성균관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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