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인문학] 고귀한 `새벽의 여신` 기다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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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11-29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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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은 그리스에서 탄생했다. 제신(諸神)의 왕이었던 제우스가 지배하는 신화의 땅 그리스에서 `신에 대한 학문'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학문'이 탄생한 것은 아이러니라고 할 것이다. 사실 그리스에서는 신도 인간처럼 행동했다. 태어나고, 죽고, 사랑하고, 질투하고, 웃다가 울고, 외로움에 몸서리치기도 했다. 서양 문명의 양대 축으로 불리는 유대인들의 신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그리스에서 `인문학'이 태동했다고 해서 모든 것이 인간적으로 해석된 것은 아니다. 참된 인간은 신을 닮아가는 존재이다. 신이 신인 까닭은 신이 완벽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참된 인간은 완벽함을 추구해야 한다. 주어진 삶에서 완벽을 추구하는 삶! 그것이 바로 그리스의 이상적인 인간형이었고, 그것이 바로 세계 최초의 인문학이 추구하던 삶의 목표였다.

`완벽함'이 도달하기 힘든 경지의 상태였기 때문에, 그리스인들은 다른 용어를 고안해 냈다. 아레테(Arete), 즉 `탁월함'이란 뜻의 단어이다. 탁월함을 추구하는 인간은 결국 완벽함에 도달하게 된다. 그것은 신의 경지에 올랐다는 것이다. 이상적인 인간의 가능성이 실현된 상태를 말한다.그리스의 인문학은 `아레테(탁월함)'를 추구했다. 따라서 그리스인의 교육을 위한 목표는 학생들에게 `아레테'를 가르치는 일이었다.

그리스의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아레테'를 가르치기 위한 교재로 사용된 것이 바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이다. 특별히 10년간의 트로이 전쟁을 마치고, 다시 10년 동안 높은 파도와 다양한 종류의 괴물들과 싸우면서 고향 이타케로 돌아가는 그리스의 영웅 오디세우스의 고난 이야기는 그리스 사람들에게 `아레테'의 영감을 불러 일으켰다. 시련과 좌절이 닥치는 것이 인생이다. 그런 도전이 우리에게 없다는 그 때는 아마 우리가 죽음을 맞이한 이후일 것이다. 누구에게나 시련과 좌절이 닥친다. 그리스인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고난이 우리들의 고단한 삶에 찾아왔을 때, 그리스인들은 오디세우스의 `아레테'를 통해 시련을 극복하는 용기를 배웠다.

오디세우스와 그의 동료들에게 시련이 닥쳤다. 외눈박이 괴물 퀴클롭스의 동굴에 갇힌 것이다. 이 거인은 포세이돈의 아들이었고 괴력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서 죽이고는 인육을 먹어 치웠다. 꼼짝없이 괴물의 손에 잡혀 죽게 된 것이다.이 순간 `아레테'를 추구하던 오디세우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그는 항상 넓적다리 안쪽에 비밀명기인 날카로운 칼을 숨기고 다녔다. 퀴클롭스가 잠시 잠이 들었을 때, 그 칼을 꺼내 "횡경막이 간을 싸고 있는 부위를 손으로 더듬어서 그자를 찌를까" 생각했다. 그러면 그는 퀴클롭스에게 산 채로 먹힌 두 명의 부하들에 대한 통쾌한 복수를 하게 된다. 그러나 오디세우스는 `아레테'를 추구하는 사람이었다.그는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깊이 생각함으로써 탁월한 지도자의 `아레테'를 보여주었다. 만약 지금 퀴클롭스의 심장을 날카로운 칼로 찌른다면, 복수도 할 수 있고, 승리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퀴클롭스가 자신의 칼에 찔려 죽어버린다면, 그들은 영영 퀴클롭스의 동굴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다. 오디세우스는 이렇게 독백한다. "그랬더라면 우리는 그곳에서 갑작스런 파멸을 당했겠지요. 우리는 그자가 갖다놓은 그 엄청나게 무거운 돌을 우리 손으로는 높다란 문에서 밀어낼 수 없었을 테니까요."

오디세우스는 복수심에 불타 칼을 휘두르지도 않았고, 눈앞에서 보이는 승리의 기회를 택할 경우 장래에 미칠 불행에 대해 깊이 생각하던 리더였다. 그는 지금 당장 날카로운 칼을 퀴클롭스의 심장에 꽂아 동료들에게 자신의 용맹함을 드러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아레테'를 추구하던 오디세우스는 성급하게 행동하지 않았고, 만용을 과시하지도 않았다. 용기있는 행동이란 이성적 판단에서 나온다. 만용은 이성이 결여된 상태이다. 그리스의 영웅 오디세우스는 숙고와 인내의 `아레테'를 보여주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기회와 이익을 차지함으로써 파멸에 길에 들어서지 않고, 숙고하고 인내하면서 때를 기다렸다. 오디세우스는 그 숙고와 인내의 시간을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는 신음하며 고귀한 `새벽의 여신'을 기다렸소."

어둠이 깊으면 곧 새벽이 오고 있다는 말이다. 불황의 긴 터널을 지나면서 우리는 신음하고 있다. 어둠이 짙은 동굴의 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레테'를 추구했던 오디세우스처럼, 숙고하고 인내하면서 고귀한 새벽의 여신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김상근 연세대 신과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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