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충북의 사과밭에 과수 화상병이 퍼졌다. 이 병은 세균이 나무의 혈관과도 같은 체관부를 타고 순식간에 번져, 한번 감염되면 나무를 뿌리째 뽑고 주변 토양까지 모두 갈아엎어야만 확산을 막을 수 있다. 한 그루의 병든 나무는 이웃 나무와 토양, 공기까지 오염시키며 생명의 순환 고리 전체를 위협하기도 한다. 도시의 운명도 이와 다르지 않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공간, 자연과 삶을 잇는 보이지 않는 연결이 단절될 때, 도시는 서서히 병들어간다. 겉으로는 화려한 고층 빌딩과 분주한 거리가 생명력을 자랑하는 듯 보이지만, 그 이면에 정
2025-07-09 18:03
김은아 도시 스토리 텔러 고층 아파트에 매몰된 삶, 공동체를 잃다콘크리트 숲 대신 골목과 공원 품어내야용적률 완화보다 삶의 질을 먼저 올리길보리수 열매를 함께 따는 터전을 꿈꾸며 신록이 더 없이 청신한 계절이다. 오븐에서 잘 구워진 것 같은 `콘크리트 파이`들이 도심에서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다. 이솝우화 `여우와 학`에서 여우는 넓은 접시에 음식을 담아 학을 대접하지만, 부리가 긴 학은 그것을 먹지 못한다. 며칠 뒤 학은 목이 길고 좁은 호리병에 음식을 담아 대접하지만, 이번에는 여우가 먹을 수가 없다. 우리 도시의 모습이 바로 이와 같지 않을까? 땅은 좁고 건물은 길다랗다. 인구소멸 위기에 빠진 소도시, 심지어는 농촌에도 고층 아파트가 들어선다. 땅을 딛고 서 있는 집이 아니라 공중에 매달린 듯하다. 마치 여우에게 호리병 속 음식을 건네는 것처럼, 인간의 본성과 맞지 않는 주거 환경에 길들여지고 있다. 고층 주거단지는 정치적 자산이다. 한국은 세계적으로도 유례없이 고층 아파트를 주요 주거 형태로 채택한 나라다. 단지 개발의 효율성과 자산 증식의 수단이라는 명분 아래, 사람의 사용성과 `삶`보다
2025-06-25 17:08
김은아 도시 스토리 텔러 흙 밟으며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길자동차가 삼키지 못한 발 끝의 감각사람이 먼저 걷는 헬싱키 중앙공원땅의 온도와 그늘의 숨결을 품어라 초등학교 1학년 즈음이다. 네모난 책가방을 메고 고불고불한 오솔길을 따라 집으로 가던 풍경이 떠오른다. 개구리 왕눈이가 타고 다니던 개구리밥 같던 넓적한 토란, 무릎을 넘어선 강아지풀, 그리고 이름 모를 들꽃들이 촘촘하게 자리잡은 좁은 길. 풀이 살에 스치면 강아지 꼬리가 종아리에 닿는 듯한 포근한 감촉, 비 오는 날이면 토란잎을 머리에 쓰고 달리던 순간들. 아침이면 이슬 맺힌 나팔꽃이 반짝이고, 해가 쨍하게 오르면 들판의 색깔은 더욱 선명해졌다. 옷이 이슬에 젖어도 마냥 좋았던 시절, 하교 길엔 하늘이 몽실몽실 구름으로 덮이고, 덥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집에 가서 뭐하고 놀까?" 하며 잽싸게 뛰어갔다. 학교 가는 길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도, 그냥 걷는 게 아니라 뭐가 그리 신났는지 그저 좋았다. 하지만 `오솔길`이라는 단어도 이제는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것 같다. 도심에는 황톳길과 숲길이 있다. 6월의 여름 햇살이 반짝이는 흙길 앞에서 잠
2025-06-11 17:21
김은아 도시 스토리 텔러 살고는 있지만 살고있지 않은 곳인간보다 지갑이 우선이 된 세상앉을 곳은 많지만 앉고싶지 않다시민들의 질문이 터전을 바꾼다 230개가 넘는 계단을 올라 산책로를 걸으니 공기가 다르다. 같은 공간인데 위 공기와 아래 공기가 확연히 차이난다. 매연과 소음, 각종 상점이 가득한 시가지. 같은 길인데 사람이 다니는 그 길은 걷고 싶지가 않다. 각종 새와 다람쥐들이 사는 이곳은 걸을만하고 걷고 싶은데, 왜 그런 것일까.답은 단순하다. 아래 거리는 `머무는 곳`이 아닌 `소비`를 기다리는 곳이기 때문이다. 벤치는 있지만 앉을 만하지도, 쉴 만하지도 않다. 특히 요즘처럼 더위가 일찍 찾아온 계절엔 더하다. 그늘로 들어가 잠시 쉴 수 있는 곳은 앞 상점에서 차려놓은 파라솔 아래나 실내 카페뿐이다.영국 사회학자 스티븐 마일즈 등 여러 연구자는 도시 공간이 소비를 전제로 설계되고, 시민이 점차 소비자로만 다뤄지는 현상을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도시가 브랜드가 되고, 공공 공간이 마케팅 채널이 되면서, 도시 정책조차 `문화`라는 이름으로 소비 실적을 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시장에서는 모
2025-05-28 18:07
김은아 도시 스토리 텔러 숨겨진 쓰레기, 스스로에게 준 면죄부남이 하니까 나도 한다는 우리의 민낯청결 도시를 만드는 결정적인 차이들깨끗한 거리는 법 아닌 양심이 만들어 신호를 기다리는데 `훅`하고 웃픈 장면이 들어온다. 소나무 등, 즉 껍질에 이쑤시개가 `콕`하고 박혀있다. 분명 누군가가 맛있는 식사를 하고 나와 구석구석 이를 들락거리다 초록 불이 켜지자, 바닥에 버리자니 보는 눈이 많고, 주머니에 넣자니 지저분하고, 그래서 죄 없는 소나무 껍질에 `쏙` 꽂아놓고 사라진 것 같다. 소나무에게는 날벼락 같은 일이지만, 어쩌면 장르만 다를 뿐 도시살이가 언제는 녹녹했겠는가.소나무 등짝에 꽂힌 이쑤시개는 `모럴 라이센싱`(Moral Licensing)의 예라고 할 수 있다. 모럴 라이센싱은 한 영역에서 도덕적 행동을 했다고 느끼면, 다른 영역에서는 비난받을 행동을 한 자신에게 면죄부를 주는 심리이다. `적어도 쓰레기를 바닥에 버리지는 않았으니, 나무에 슬쩍 꽂아놓는 것은 괜찮아`라는 생각이다. 거리를 걷다 보면, 이런 모럴 라이센싱의 사례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담배꽂이로 변해버린 화분들, 벤치 사이에 구겨 넣
2025-05-14 08:05
김은아 도시 스토리텔러 근로자의 날, 공동체는 어디 있는가숫자 아닌 이름으로 살아야할 이유연대는 작은 골목서부터 시작된다기계가 아닌 인간으로 삶을 꾸려야 근로자의 날이다. 근로자의 권리를 기념하는 이 날, 우리가 살아가는 이 도시는 변함이 없다. 초고층 빌딩과 수십억 원짜리 아파트, 끊임없이 오르내리는 부동산, 주가, 금리. 삶은 숫자로 환산되고, 사람은 등급으로 분류된다. 차가운 유리와 콘크리트 사이로 사람들은 바쁘게 움직인다. 도시는 계절 따라 활기를 찾고 알록달록 색을 입는데 사람들의 표정은 무채색만 같다. 도시는 언제나 그대로인데, 도시민들은 지쳐 보인다. 제 역할을 잃은 정치, 대통령은 필수코스 탄핵을 밟고, 정치인들은 제 밥그릇 챙기느라 셈법이 복잡하다. 두 눈은 카메라를 응시하고, 그들의 입술은 장미보다 붉지만, 낭만과는 영 딴판이다. 그들의 명운이 담긴 선거를 목전에 두고 온갖 공약이 난무한다. 신선식품 정도의 짧은 유통기한이다. 배고픈 애벌레는 끊임없이 먹고 아름다운 나비라도 되지만, 이들에게도 더 나은 부활이 있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정치는 `세상을 다스리고 사람들을 바르
2025-04-30 18:23
김은아 도시 스토리텔러 녹지 많다고들 하지만 정작 손에 닿지않아숫자로 존재하는 정원, `그림의 떡`에 불과자연은 배경이 아니라 우리가 속한 시스템미화가 아닌 공존, 도시 재생 새 기준 돼야 길을 걷다 우연히 마주친 한 풍경이 오래도록 기억이 남아있다. 원래 가로수가 있던 자리였는데 유독 그곳에만 나무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화사한 꽃밭이 자리 잡고 있었다. 각종 화분과 작은 돌 조경까지 살뜰한 손길이 배어있었다. 태풍에 쓰러진 고사목을 베어내고 남은 자리를 발 빠른 상점 주인이 차지해서 `한 뼘 정원`을 만들었던 것이다. 빠진 이가 휑하니 보이는 것보다 나은 일이긴 하다. 사람들은 왜 `빈 땅`을 보면 그냥 두지 못하는 것일까? 무언가를 심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 같다. 어르신들은 손바닥만 한 빈터라도 보이면 대파, 고추, 배추 등 각종 작물을 심으신다. 단순한 먹거리보다는 돌보는 마음이 담긴 `작은 정원` 내지는 `농장`일 것이다. 그마저도 아쉬운 도심의 주민들은 `꽃이나 화분`을 집 안에 들인다. 철철이 바뀌는 꽃을 가꾸는 일이 주는 기쁨과 식물과의 교감에서 오는 안정감은 분명 소중하다. 그러나 이
2025-04-16 17:46
김은아 도시 스토리텔러 보이는 꽃만 심는 정원, 나무는 사라져우리는 정말 `진짜` 자연을 보고 있는가`전시`가 아닌 살아있는 생태가 필요해계절 따라 자라는 식생이 도시 바꾼다 봄이 오고 날이 풀리면, 사람들은 어김없이 꽃이 있는 곳으로 몰려든다. 마치 꿀을 따러 모여드는 꿀벌처럼 말이다. 도시 외곽의 놀이공원과 관광지, 리조트에는 튤립, 수선화, 유채꽃 등 화려한 봄꽃이 가득하고, SNS에는 앞다투어 꽃 사진이 올라온다. 사람들은 기꺼이 입장료를 내고 줄을 선다. 하지만 그 꽃들은 사실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익숙한 품종이다. 꽃시장이나 대형마트 앞에서도 쉽게 마주치는, 돈만 있으면 살 수 있는 꽃들이다.문제는 이런 익숙한 장면이 국가정원과 수목원같은 공공정원에서도 반복된다는 점이다. 튤립이 지나면 백합, 백합이 지나면 장미다. 꽃은 계절을 따라 갈아엎듯 바뀌지만, 그 자리를 지켜온 느티나무 한 그루, 수백 년 된 은행나무 같은 존재는 찾아보기 어렵다. 예산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나무조차도 어린 묘목으로 대체되고, 대부분의 비용은 몇 주 피었다 지는 초본류 꽃에 집중되는 실정이다. 계절은 바뀌지만, 정
2025-04-02 18:22
김은아 도시 스토리텔러 나눔과 온정이 만든 특별한 공간지속가능한 복지의 새로운 모델기부와 참여로 기존 인식을 전환본질은 배급이 아닌 함께하는 것 얼마 전, 한 어르신이 맛집이라면서 아주 신나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에 점심을 주는데 밥값이 100원이라는 것이다. 음식을 포장도 해줘서 그 어르신은 나흘 동안 점심을 편하게 드실 수 있다고 했다. 가격은 100원이지만, 그 어르신 말씀이 당신께서는 4인분어치 점심으로 2000원을 낸다며 꼭 한번 가보라고 주변에 홍보를 하고 계셨다. 길을 지날 때마다 보았던 `100원의 행복`이라는 곳의 정체가 밥집이었던 것이다. 들어 가보니 따끈한 멸치육수에 갓 삶은 국수를 말아주는데 담백한 맛이 일품이었다. `100원의 행복`은 단돈 100원으로 따뜻한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도록 사회봉사단체나 기관에서 운영하는 일종의 사회 급식 프로그램이다. 봉사자들은 깔끔한 유니폼을 입고 식당으로 손님을 안내하기도 하고, 심지어 먹고 가라고 호객도 열심히 한다. 실제로 100원만 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일부는 아예 값을 지급하지 않기도 하지만, 대부분 1000원, 2000
2025-03-19 18:32
김은아 도시 스토리텔러 `희망` 없는 희망곳간, 나눔 방식은 달라져야예산은 있어도 배려는 없어, 공허한 복지행정조선시대 사대부 곳간에서 배우지 못한 것들소외를 돕는다면서 오히려 소외 키우는 구조 곳간은 익명성이 보장되어야 모름지기 곳간이다. 얼마 전 한 지방의 행정기관 입구에 있는 `희망나눔곳간`을 보았다. 서너 평가량의 아담한 목조건물이다. 곳간이 무엇이길래 사람들이 드나드는 출입구에 자리 잡았나 들어가 보니, 몇 가지 소박한 생필품과 약간의 식료품이 진열되어 있었다. 곳간 관리자는 취약계층이 바우처를 가지고 와서 필요한 물품을 가져가는 곳이라고 했다. 장부도 있다. 신원을 확인하고 장부에 이름과 품목도 적는다. 한 달에 1회, 1만원 한도에서 원하는 물건을 가져갈 수 있다고 한다. 희망곳간은 세월호 참사 이후 안산시가 공동체 회복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시작한 이후, 지자체들의 참여가 늘고 있는 추세다. 나눔 문화 확산, 지역공동체 회복, 취약계층 지원 등을 목적으로 한다. 복지 사각지대에 있는 약자에게 온정의 손길을 내미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방식이다. 지자체마다 사정
2025-03-05 17:52
김은아 도시 스토리텔러 디지털 진화할수록 아날로그를 갈망한다AI가 바꾸는 도시, 우리는 준비돼 있는가답은 기술·자연이 하나되는 공간 만들기스마트한 세상일수록 공존 찾아 나서야 최근 아이폰 사용자들은 10여 년 전 출시된 구형 휴대폰을 동시에 사용한다. 값을 더 주고서라도 중고를 구하는 열풍이 일고 있다. 필름카메라의 아날로그적 감성을 선호하는 이 현상은 기술이 고도화될수록 오히려 아날로그적 가치를 추구하는 인간의 양가적 속성을 보여준다. AI 기술로 완벽한 데이터 분석과 코칭을 제공하는 스크린 골프장이 늘어날수록, 필드가 있는 물리적 골프장의 수요도 함께 증가한다. 역설적으로 디지털 심화는 물리적 갈망을 증대시킨다.AI가 도시를 더욱 정교하게 관리할수록, 시민들은 오히려 더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도시 경험을 추구한다. 싱가포르의 `Virtual Singapore` 프로젝트는 AI를 도입하여 도시 전체를 디지털 트윈으로 구현하지만, 도시를 더욱 자연 친화적으로 만들었다. 도시 곳곳에 수직 정원과 생태 통로를 만들었고, 자연 요소들이 도시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실시간으로 분석하고 최적화하여 도시를 하나
2025-02-19 17:10
김은아 도시 스토리텔러 공간 가치, 우리가 보지 못한 것들도시의 토끼풀이 들려주는 이야기매해 꽃 피어나는 건 매우 값진 일이미 거기 있는 것, 다만 발견할뿐 한파에 바람도 매섭지만 봄을 세우는 데 부족함은 없습니다. 입춘(立春). 손에 잡히지 않는 봄을 세운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표현인지요. 그런데, 꼭 그렇기만 한 것도 아닙니다. 마당 한 켠에 고이 가꾼 화초들의 꽃망울도, 겨우내 얼어붙은 길 위 땅바닥에 납작 들러붙어 있는 봄맞이꽃도, 냉이도 봄 길을 안내하기는 매 한가지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험한 땅에서 생명을 키워 잡초라 불리는 식물의 꽃을 보자고 기름을 때 가며 온실에서 이들을 키울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 같습니다. 꽃도 금수저와 흙수저인 셈입니다. 그런데, 꼭 그렇기만 한 것도 아닙니다. 한 세기를 사로잡을 향기를 만든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이죠. 크리스챤 디올은 어머니 마들렌에게 특별한 교육을 받았습니다. "꽃을 볼 때는 그 색과 모양뿐만 아니라, 그 향기와 감촉까지 느껴야 한다"라고 말이죠. 직접 꽃향기를 맡아보게 하고, 꽃잎을 직접 만져보게 했습니다. 그런 덕분에 크리스찬은 어
2025-02-05 1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