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박까지 동반한 비가 요란하게 다녀갔다. 개나리는 빛깔이 더욱 진해지고, 벚꽃은 새싹 속에서 더 빛이 난다. 공기는 말할 것도 없고 하늘도 파랗다 못해 청명하다. 아침에 가장 먼저 눈을 뜨며 하는 일은 창문을 열고 햇살에 반짝이는 나무를 바라보는 일이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의 주인공 히라야마가 매일 아침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 ‘코모레비’를 바라보며 미소 짓던 장면처럼 말이다. 오래된 빌라에 작업실을 하나 마련해놓고 나는 수시로 밖을 내다본다. 특히, 내가 심은 진달래가 잘 있는지, 밤사이 또 자랐는지 말이다. 심은지 이제
2026-04-08 16:32 김은아 도시 스토리 텔러
아주 오래된 가게들이 있는 그 길목에 치킨집이 생겼다. 화려한 색감의 디자인과 깔끔한 실내, 그 프랜차이즈 치킨점은 그럴싸했다. 내심 반가웠다. 배달도 되고, 위치도 괜찮았다. 치킨집 바로 옆에는 수십 년도 더 된 자그마한 점빵이 있다. 그 옆으로 비슷한 세월을 담은 이발소, 정미소, 방앗간이 나란히 붙어 있다. 길 건너편에는 농협과 마트도 하나 있다. 머리카락이 허연 할아버지가 혼자 운영하시는 이발소 앞을 지나며 생각했다. “이 동네도 도시 재생을 하나 보다. 오래된 것들이 남아있는 이 길목에 새로운 무언가가 들어서면 활력이 넘
2026-03-25 16:48 김은아 도시 스토리 텔러
이태원 뒷골목, 촘촘한 주택 사이로 붉은 등이 켜진 해묵은 가게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정육점이다. 반가움에 발길을 멈추고 한참을 머물렀다. 화려한 네온사인과 외국어 간판이 이어진 큰길에서 불과 두 걸음만 들어왔을 뿐인데, 풍경이 달라졌다. 1970년대에 봄직한 투박한 글씨체로 쓴 셀로판 간판, 듬성듬성 큼직하게 썰어놓은 고기가 진열된 유리장, 묵직한 나무 도마와 오래된 저울. 연세 지긋한 사장님이 고기를 손질하고 계셨다. 꾸민 흔적이라곤 없는 소담한 그곳엔 시간만이 그 자리를 말하고 있었다. 사실 이런 장면은 이태원만의 전유물이
2026-03-11 18:13 김은아 도시 스토리 텔러
며칠 봄날 같던 날씨가 돌변하더니 지방에 큰 눈이 오면서 겨울왕국이 되었다. 발이 묶인 사람도, 명절 내 피로가 쌓인 사람들도 찜질방을 향한다. 이유가 그리 거창하지는 않다. 씻고, 몸을 지지고, 따뜻한 바닥에 누워 쉬러 간다. 목욕과 온돌이라는 오래된 생활 방식이 도시의 빌딩 안으로 들어와 다른 형태로 자리 잡은 것뿐이다. 그런데 이 단순한 공간이 유독 도시적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도시인의 삶을 지탱하는 이 힘은 어디에서 올까. 도시는 더욱 진화했다. 업무 공간의 생산성은 극대화되었고, 소비 공간은 구매력을 자극하기에 부족함
2026-02-25 16:52 김은아 도시 스토리 텔러
골목마다 주인 없는 가게들이 하나둘 늘어나고 있다. 2020년 3000개 안팎이던 무인 카페가 최근 1만개를 넘어 4배 이상 급증했다. 인건비 부담과 비대면 선호가 맞물린 시대의 단면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기계가 사람을 대체하는 삭막한 풍경이라 하지만, 그 건조한 숫자 너머에는 도시의 고달픈 숨소리들이 모여드는 ‘익명의 서식지’가 자리하고 있다. 사람들이 진짜 이곳을 찾는 이유는 다르다. 시간 제약 없이 언제든 들어갈 수 있고, 사람 눈치 보지 않고 앉아 있을 수 있다는 것. 새벽 두 시에 들어가도 눈치 줄 사람이 없다는 것. 그
2026-02-11 17:56 김은아 도시 스토리 텔러
얼마 전, 한 도서관에서 목격한 장면이다. 뼛속까지 시리는 바람을 피해 로비로 들어선 어르신이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행색이 남루한 어르신은 출입문 앞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으셨다. 그저 붉게 언 두 손을 호호 불며 몸을 녹이고 계셨다. 5분쯤 지났을까. 주변의 공기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옆자리 사람이 슬쩍 자리를 옮겼다. 누군가는 힐끔거렸다. “나가세요”라고 말한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10분을 버티지 못한 채 다시 추운 거리로 나섰다. 쫓겨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나간’ 것이었다. ‘공간의 수치심’(Spatial Sh
2026-01-28 17:26 김은아 도시 스토리 텔러
한 해가 바뀌었다. 거리의 장식은 하나둘 사라졌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고 싶어 한다. 그렇게 새해의 다짐과 계획 사이를 걷다 보면, 문득 지난 여름 캐나다 온타리오주 도시 런던의 어느 골목에서 마주했던 작은 풍경이 떠오른다. 돌이켜보면, 내가 받았던 가장 따뜻한 선물은 화려한 포장지 속에 있지는 않았다. 그중 하나는 사과 한 알이었다. 그것도 과수원의 전부였던. 그날 내가 방문한 곳은 온타리오주 런던의 월틀리 빌리지(Wortley Village)였다. 2013년 캐나다 도시계획협회(CIP)가 ‘캐나다에서 가장
2026-01-14 17:37 김은아 도시 스토리 텔러
연말, 스산한 거리에서 유독 눈에 밟히는 현수막이 하나 있다. 바로 ‘어르신 공공일자리 모집’ 공고다. 이 문구를 볼 때면 뜬금없게도 애니메이션 ‘주토피아 2’의 한 장면이 겹쳐 보인다. 물개들이 물속에서 우아하게 앉아 따뜻한 차를 마시는 장면이다. 물속에서 차를 즐기는 발칙한 상상력에 감탄하다가도, 문득 우리는 왜 그런 유연함을 갖지 못하는지 자문하게 된다. 현실로 눈을 돌려 시니어를 바라보자. 왜 어르신은 늘 ‘단순한 일’만 할 수 있다고 단정할까. 왜 그들의 경험과 역량은 제도권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무’(無)가 되는 것인가
2025-12-17 17:13 김은아 도시 스토리 텔러
아침 출근길, 지하철 개찰구 앞이다. 카드를 찍으면 누구나 듣는 익숙한 소리, “삑.” 하지만 “삑삑” 하고 소리가 두 번이 난다. ‘경로우대용 카드’다. 이 작은 소리는 마치 단순한 요금 구분을 넘어, 매번 사용자에게 “당신은 노인이다. 당신은 오늘 복지 혜택을 쓰고 있다”라고 조용히, 반복적으로 선언하는 것만 같다. 시작은 복지였지만, 남은 것은 ‘표식’과 같은 사회적 낙인화는 아닐까. 공공장소, 그것도 가장 이동량이 많은 지하철 개찰구라는 ‘도시의 문’ 앞에서, 한 개인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강제적으로 노출된다. 줄을 서서 기
2025-12-03 18:00 김은아 도시 스토리 텔러
현대 도시는 밀도라는 숙명을 안고 살아간다. 밀도의 생명은 효율성이다. 도시가 숨 쉬는 방식은 거창하지 않다. 넓은 잔디밭, 호수도 필요 없다. 그저 도보로 몇 분 이내에 닿을 수 있는 작은 녹지면 충분하다. 30분 이상을 걸어가야 하는 널따란 공원은 ‘여유’이지만, 몇 분 이내 거리의 작은 공원은 ‘삶’이다. 서울 보라매공원과 동명(同名)의 공원이 대전 둔산동, 행정의 중심부를 가로지른다. 공원이라기보다 도심의 동맥을 따라 흐르는 길고 가는 ‘녹색 혈관’에 가깝다. 시청과 법원, 상업 지구가 촘촘히 들어선 이 땅에서, 이 선형(
2025-11-19 17:32 김은아 도시 스토리 텔러
도심의 가로와 골목은 차량의 숨소리로 가득하다. 내 상점 앞에 차를 대고, 다른 곳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눈에라도 띄면, 어김없이 가게 주인의 날 선 소리가 들려온다. “왜 남의 가게 앞에 차를 대요?” 그 가게 앞이 맞기는 하지만, 상점 주인의 땅은 아니다. 그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단순히 공간을 비키라는 요구를 넘어선 일종의 분노도 담겨있다. 공공 도로 위에 놓인 고깔과 물통은 도로를 사유화하려는 감정의 상징이다. 이 풍경은 도심 상가뿐 아니라 주택가 골목, 오래된 연립주택 앞 도로까지 다르지 않다. ‘내 가게 앞’과 ‘내 집 앞
2025-11-05 16:32 김은아 도시 스토리 텔러
캐나다 온타리오주 런던 스프링뱅크 공원을 걷던 중 한 벤치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녹음 사이의 평범한 나무 벤치. 등받이에 붙은 작은 금속 플라크가 햇빛에 반짝였다. 가까이 다가가 글자를 읽었다. 16살에 세상을 떠난 한국인 소녀의 이름과 함께 “영원히 우리 곁에, 사랑하는 아빠, 엄마, 그리고 강아지 첼시”가 쓰여 있었다. 캐나다에서 세상을 떠난 한국인 소녀의 이름을 보는 순간, 기분이 묘했다. 이름 석 자를 나도 모르게 마음에 새기며 상상을 해보았다. 첼시와 이 공원을 산책했을 소녀, 웃음소리, 남겨진 이들의 그리움이 벤치에
2025-10-22 17:42 김은아 도시 스토리 텔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