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희 정치부기자 "인생은 초로와 같아서 만날 때가 많지 않다." 운명을 예견했을까. 보위에서 쫓겨나기 9일 전, 연산군은 나인들을 거느리고 후원에서 잔치를 벌이다가 짧은 시를 읊었다. 이후 눈물을 흘렸는데, 다른 사람들은 조용히 비웃었다. 그러나 숙용 전씨와 장녹수는 슬피 흐느끼며 눈물을 머금었다. 연산군은 그들의 등을 어루만지며 "지금 태평한 지 오래이니 어찌 불의에 변이 있겠느냐마는, 만약 변고가 있게 되면 너희들은 반드시 면하지 못하리라"고 했다. 당시 숙용 전씨와 장녹수는 연산군의 총애를 받으며 온갖 전횡을 일삼아 악명이 높았다. 예상이 맞아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중종반정 직후 군기시 앞(서울시청 광장이 있는 지점)에서 참수형에 처해졌다. 연산군 역시 반정 당시 도주하거나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결과를 받아들였다. 궁을 장악한 반정세력이 옥새를 요구하자 "내 죄가 중대해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좋을 대로 하라"며 내줬다.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를 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연산군은 갓을 쓰고 분홍 옷에 띠를 두르지 않고 나와 "내가 큰 죄가 있는데 특별히 상(중종)의 덕을 입어 무사하게 간다"며 가마에
2025-03-03 18:38 김세희 기자
김세희 정치부 기자 고려 무신집권 시기, 권력자의 집은 국가 대소사를 좌지우지하는 공간이자 자신의 사적 욕망을 투영하는 세계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과시하기 위해 무척 신경을 썼다. 4대 60여년간 권력을 장악한 최씨 집안에서 사치의 극치를 볼 수 있다. 최충헌은 황제가 사는 대궐과 비슷한 규모의 집을 지었다. 당시 토목공사가 대단해 나라 안이 시끄러웠는데 "몰래 사내아이와 계집아이를 잡아다가 오색 옷을 입혀서 네 모퉁이에 묻어 공사의 해로운 기운을 물리친다"는 유언비어가 돌 정도였다. 이 틈을 타 무뢰배들은 최충헌에게 아이를 바치기 위해 어린 아이들을 잡으러 다녔으며, 아이를 가진 사람들은 모두 아이들을 깊이 숨겼다. 최충헌이 어사대(御史臺)에 명령을 내려 시가지에다 "인명은 매우 중요한데, 어찌 사람을 땅에 묻어서 재앙을 물리친단 말인가. 어린이를 잡아가는 사람이 있으면 붙잡아서 신고하라"는 방을 붙인 뒤에야 사태가 수습됐다. 그만큼 권력자가 벌이는 집안 공사가 사치스럽고 유별났다는 얘기다. 장남 최우는 아버지를 능가했다. 그는 집에 큰 누각을 지었는데, 누각 위에는 손님 1000명을 앉
2025-02-17 18:16 김세희 기자
김세희 정치부 기자 한국 현대사에서 정치적 갈등이 극단적 양상으로 치달았던 사례는 적지 않다. 대표적인 것이 제주 4·3사건과 여순사건이다. 이념·정치 대립이 내전으로 비화하면서 비극을 낳았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계엄령을 통해 강경 진압에 나섰다. 경찰과 군인이 대거 투입됐고, 극우 청년단체인 서북청년회도 가세했다. 많은 민간인들이 `폭도`와 `비적`으로 규정되면서 인권 침해와 희생이 이어졌다. 여기에는 선명한 이분법만이 존재했다. 역사는 돌고 돈다고 했나. 최근 한국 사회에 이와 유사한 갈등의 조짐이 보인다. 탄핵 정국 속에서 정치적 대립이 격화되면서 극단적인 목소리가 등장하고 있으며, 이는 정치적 혼란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지난달 9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 반대 시위에 참여한 일부 청년들이 이른바 `백골단`이라는 이름으로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김민전 국민의힘 의원의 주선이었다고 한다. 김 의원은 이들과 기자회견장에 같이 서기도 했다. 백골단은 1980~90년대 민주화운동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진압·검거했던 사복 기동대를 일컫는 별칭이다. 이들은 "윤 대통령을 지키는 자경단으로 활동하겠다"고 밝혔
2025-02-03 18:00 김세희 기자
김세희 정치정책부 기자 "나라를 망해먹은 왕을 위해 내가 흘릴 눈물은 없어."1919년 1월 고종이 죽고 난 후 일어난 3·1 운동 당시, 외국 기자가 시위하는 군중 한 사람과 인터뷰한 기사에 나온 구절이다. 혹자는 동의하기 어려울 수 있다. 일부 대중매체나 연구자들은 고종을 구국의 인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어서다. 다만 역사적 인물의 평가는 냉정할 수 밖에 없다. 고종은 시대착오적 인물이었다. 그는 온 세계가 근대사회 진입에 진통을 겪고 있는데도 왕권과 국권을 혼동했다.근대로 이행하지 못하면 바로 식민지로 전락할 수 밖에 없는 제국주의 시대였지만, 그는 인식하지 못했다. 국민적 지지를 기반으로 국가를 지켜내야 할 시점에 왕권 유지를 위해 청나라·일본 등과 외교적으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고, 외국 군대를 끌어들여 동학농민운동과 임오군란 등을 진압했다.정부 재정도 왕실에 집중됐다. 화폐 발행으로 남은 이익은 왕실 재정을 담당하던 내장원에 흘러 들어갔다. 일본·러시아·프랑스·독일 등에서 도입한 차관은 광산·도로 개발 사업 등에 쓰기로 했지만, 상당 부분이 고종의 금고로 들어갔다. 1905년 재정문서를 보면 왕실 재
2025-01-13 18:23 김세희 기자
김세희 정치정책부 기자 안타깝게도 재난은 예측하지 못하는 순간 발생한다. 현대보다 문명이 발달하지 못한 전근대 시대는 더 그렇다. 조선시대는 선박 침몰 같은 재해가 빈번했다. 한국사 데이터베이스에 있는 조선왕조실록에서 `침몰`을 검색하면, 관련 기사가 663건이나 나온다. 대부분 풍랑을 만나거나 암초에 부딪혀 좌초된 사례가 많다. 사망자도 적지 않다. 문제는 그 다음, 재난을 수습하는 위정자의 자세다. 역시 역사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조선 태종 3년(1403년) 경상도에서 오던 조운선 34척이 바다에서 침몰돼 1000여명 이상 죽고 쌀은 만여석이 잠겼다. 당시 태종은 "책임은 내게 있다. 만인을 몰아서 사지에 나가게 한 것이 아닌가"라고 자신을 책망했다. 그러면서 "쌀은 비록 많더라도 아까울 것이 없지만, 사람 죽은 것이 대단히 불쌍하다. 그 부모와 처자의 마음이 어떠하겠는가"라고 탄식했다. 그 이후 태종은 각지에서 내는 곡물을 육로로 운반하게 했다. 재난으로 인한 `분노한 민심`을 다스리는 데도 정성을 기울일 수 밖에 없었다. 재난 자체가 사람들을 슬픔과 충격에 빠뜨리기 때문이다. 배점모 호원대 교수가 쓴 논문 `고려 및
2024-12-30 18:28 김세희 기자
김세희 정치정책부 기자 "계엄당국은 18일 오후부터 공수부대를 대량 투입해 시내 곳곳에서 학생, 젊은이들에게 무차별 살상을 자행했으니 아 설마, 설마 설마했던 일들이 벌어졌으니, 우리 부모 형제들이 무참히 대검에 찔리고, 귀를 잘리고, 연약한 아녀자들이 젓가슴을 잘리고 차마 입으로 말할 수 없는 무자비하고도 잔인한 만행이 저질러졌습니다."광주 시민군이 1980년 5월 25일 전남 도청 앞에서 배포한 궐기문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에 나온 내용이다. 이 글은 전두환과 신군부가 5월 18일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한 후, 광주에 투입한 계엄군이 저지른 만행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가해자인 전두환은 전혀 사과를 하지 않았다. 문민정부가 1995년 구속하고 무기징역까지 선고했지만, 2년 뒤 사면된 후엔 망언만 일삼았다. 수천 억원 가량의 추징급 완납을 거부하면서 "예금이 29만원뿐"이라고 말해 공분을 샀고, 2008년 총선 당시 자신의 언론 보도에 대해 "젊은 사람들이 나에 대해 아직 감정이 안 좋은가 봐. 나한테 당해보지도 않고"라고 말해 논란에 휩싸였다. 심지어 1980년 5월 계엄군의 무차별적 헬기 사격을 목격한
2024-12-16 18:21 김세희 기자
김세희 정치정책부 기자 "당시 복신이 그 병권을 독점한 뒤 부여풍과 점차 서로 시기했다. 복신이 병이 들었다고 하고 지하실에 누워 있으면서 장차 부여풍이 문병 오면 습격해 죽이려고 했다. 부여풍이 이를 알고 그가 믿는 사람들을 거느리고 복신을 불의에 습격해 죽였다."(신당서, 권 제220 `동이열전` 제145)백제가 멸망한 지 3년째 되던 해, 부흥운동을 벌이던 세력 사이에 벌어졌던 상황이다. 나라를 다시 세워야겠다는 목표는 어느덧 사라지고, 자신들끼리 권력투쟁에만 골몰하고 있었다. 급기야 서로를 죽이기 위한 쟁투가 벌어졌다. 처음부터 이러진 않았다. 서기 660년 백제부흥운동을 시작할 때만해도 기세가 등등했다. 당시 무왕의 조카인 복신은 좌평 정무, 달솔 부여자신 등과 함께 백제 유민을 규합해 나당연합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봉기한 지 10일 만에 200개의 성을 탈환했고, 왜국과 힘을 합쳐 수도였던 사비성을 포위해 당나라 군대의 보급도 끊었다. 나당 연합군도 흔들렸다. 당은 철수를 고려할 정도였고, 신라에서도 패한 장수들에게 벌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말 그대로 부흥군의 전성기였다. 당장이라도 백제를 되살릴 기세
2024-12-02 17:52 김세희 기자
김세희 정치정책부 기자 "백담사도 가고 감옥도 갔다 왔다. 집사람이 추징금 대납도 했다. 그런데 또 압수수색이라니…," 8년간 철권통치를 했던 독재자 전두환 전 대통령이 했다는 하소연이다. `5월 광주`를 밟고 권좌에 오른 그의 집권기간 중 숱한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거나 꿈과 자유를 차압당했는데, 저런 발언을 서슴지 않고 내뱉는다.사과는 없다. 거의 망언 일색이다. 수천 억원 가량의 추징급 완납을 거부하면서 "예금이 29만원뿐"이라고 말해 공분을 샀고, 2008년 총선 당시 자신의 언론 보도에 대해 "젊은 사람들이 나에 대해 아직 감정이 안 좋은가 봐. 나한테 당해보지도 않고"라고 말해 논란에 휩싸였다. 2017년 자신이 펴낸 회고록에서 고(故) 조비오 신부에 했던 비난은 가관이다. 그는 1980년 5월 계엄군의 무차별적 헬기 사격을 목격한 조 신부에 대해 "성직자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표현했다. 이 발언으로 그는 2019년 3월 조 신부에 대한 사자명예훼손 혐의 재판에 서게 된다. 그는 1심에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전 전 대통령은 2021년 사망했다. 끝내 5·18 광주 민주화운동 희생자와
2024-11-18 18:13 김세희 기자
김세희 정치정책부 기자 "사헌부(司憲府), 시정(時政)의 잘잘못을 헤아려 논술하며 풍속을 교정하고 (관리에 대한) 규찰과 탄핵의 임무를 맡았다. 국초에 사헌대(司憲臺)라 칭했다가 성종 14년(995년)에 어사대(御史臺)로 고쳤으며, (관원으로) 대부(大夫)·중승(中丞)·시어사(侍御史)·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감찰어사(監察御史)를 두었다." (고려사 지·백관)`고려사`에 나온 사헌부에 대한 기록이다. 이 기관은 관료를 감찰해 위법행위를 저지를 때 탄핵을 하는 게 주요 임무다. 995년이라는 숫자에서 알 수 있듯이 탄핵의 역사는 유구하다. 전근대 시대부터 지금까지 무려 1000여년이나 이어오고 있다. "정몽주는 태조의 위엄과 덕망이 날로 성해 조정과 민간이 진심으로 붙좇음을 꺼려했다…(중략)…대간을 통해 태조의 신임을 받는 삼사 좌사 조준·전 정당 문학 정도전·전 밀직 부사 남은·전 판서 윤소종·전 판사 남재·청주 목사 조박을 탄핵하니, 공양왕이 그 글을 도당에 내렸다."탄핵의 성격은 상황마다 다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고려말 충신으로 알려진 정몽주가 태조 이성계의 측근세력을 탄핵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법적으로 잘못을 저
2024-11-04 13:50 김세희 기자
김세희 정치정책부 기자 조선 세종 7년, 사간원에서 보고가 올라왔다. "지금 육조·대간이 독대해 아랫사람의 실정을 다 아뢰도록 하는데, 이것은 진실로 성대(盛代)의 아름다운 법입니다. 그러나 사관이 참여하지 못하니 그 아름다운 말씀과 착한 행실을 어떻게 해서 후세에 전하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이제부터 윤대(輪對)할 때에 사관도 참여하도록 하시길 원합니다."신하와 임금이 독대할 때 사관도 배석해 기록할 수 있도록 배려해달라는 요구다. 세종은 거절했다. 사관이 일일히 그 자리에서 나온 대화를 기록하면 신하가 임금에게 직언을 할 수 없다는 이유다. 실제로 세종은 신하와 연쇄적으로 독대를 하는 `윤대`를 주로 했다. 신하가 하는 말의 진위 여부를 가려낼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출이기도 했다. 세종의 업적을 봤을 때 독대는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그러다 성종 시기부터 독대를 금지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사관이 들어오지 못하면 남을 헐뜯는 말이 오갈 수 있다는 이유였다. 선대인 세조 시기에 많은 폐단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왕권 쿠데타인 계유정난을 통해 집권한 세조는 측근 세력을 중심으로 정치를 구현했고, 이 과정에
2024-10-21 18:50 김세희 기자
김세희 정치정책부 기자 예나 지금이나 권력자에게 자식은 `애물(속을 태우는 존재)단지`다. 우리 정치사에서 자식이 일으킨 논란으로 인해 이런 저런 뒷말을 낳았던 사례는 부지기수다. 고려의 가장 포악한 군주로 꼽히는 충혜왕, 그는 세자 시절부터 절 지붕에 있는 새를 잡는다고 방화를 했다. 불량배와 어울리면서 여자를 겁탈하고 패악질을 일삼았다. 무엇보다 광적으로 사냥을 나갔다. 당시 왕실의 사냥은 요리사, 짐꾼, 전문 사냥꾼, 수백명의 몰이꾼이 동원돼 경비가 상당했다. 당연히 신하들 사이에선 뒷말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당시 고려의 상국으로서 국왕의 책봉 권한을 갖고 있던 원나라마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부친인 충숙왕이 충혜왕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건 당연지사였다. 심지어 `날건달`이라고까지 부르기도 했다. 충혜왕이 훗날 원나라 황실에 의해 폐위된 후 유배를 가던 중에 죽자, 사관이 백성들의 반응을 묘사한 구절이 많은 것을 말해준다. "나라 사람들은 그 소식을 듣고 슬퍼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으며, 신분이 낮은 사람 중에는 심지어 기뻐 날뛰면서 다시 살 날을 보게 되었다고 하는 사람까지 있었다."충혜왕 같은 인사
2024-10-07 18:26 김세희 기자
김세희 정치정책부 기자 "스스로 명종을 부립(扶立)한 공이 있다하여 때로 주상에게 `너는 내가 아니면 어떻게 이 자리를 소유할 수 있었으랴` 하고, 조금만 여의치 않으면 곧 꾸짖고 호통을 쳐 마치 민가의 어머니가 어린 아들을 대하듯 함이 있었다."(조선왕조실록) "어떤 때는 때리기까지하여 임금의 얼굴에 기운이 없어지고 눈물자국까지 보인 적이 있었다."(연려실기술)조선시기, 문정왕후가 아들인 명종을 대하는 태도를 묘사한 기록이다. 임금의 어머니라고 하지만 한 국가의 지존에게 이렇게까지 한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시대로, 통념을 뛰어넘는다. 당시 명종은 왕후의 거듭된 괴롭힘으로 심혈증(心熱症, 신경쇠약)까지 얻었다. 사관들은 왕후가 죽은 뒤 사초에 "윤비(尹妃)는 사직의 죄인"이라고 기록했다.도대체 문정왕후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왕후는 권력 앞에서는 잔인한 인물이었다. 자신의 아들이 아닌 인종이 왕위에 있을 때는 그에게 계속 스트레스를 줬다. 아침·점심·저녁 문안인사를 할 때마다 원망섞인 말을 했고, 심지어 "우리 가문을 살려달라"고도 했다. 인종이 자신의 가문을 해칠 사람처럼 몰아세운 것이다. 왕대비라는
2024-09-23 18:21 김세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