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종훈의 근대뉴스 오디세이
총 143건-
1926년 여름 경성은 치정(癡情) 사건으로 떠들썩했다. 불과 하루 사이 발생한 두 건의 사건은 당시 경성 시민들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사랑과 질투, 집착이 뒤엉킨 남녀 관계는 참혹한 폭력과 살인으로 이어졌고 신문 사회면을 장식했다. 6월 25일자 동아일보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있다. “어제 24일 오전 3시경에 시내 길야정 34번지 지태원(池泰元·27)은 시내 옥천동 73번지 박창호(朴昌鎬)의 선술집으로 달려가서 걸린 그 집 대문을 박차고 그 집 부엌 도마에 놓인 식도(食刀)를 들고 박창호가 자기의 첩 리봉의(李鳳儀·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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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조선에서 여성이 직업을 갖는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1926년 5월 조선일보는 ‘조선 여성이 가진 여러 직업’이란 연재를 통해 당시 여성들의 직업 세계를 소개했다. 오늘날에는 평범한 직업이지만 당시에는 편견과 싸워야 했던 개척자의 길이었다. 첫 번째는 여성 의사 유영준(劉英俊)씨 이야기다. “그가 의사 생활을 시작한 지가 벌써 3년이나 넘었으니 동경 일본 적십자병원에서 1년 동안 실습이 있었고 작년 정월부터는 시내 동대문 부인병원과 태화진찰소 의사로 있었으며 현재는 세부란스병원 소아과와 태화진찰소를 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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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5월 24일자 조선일보에 100년 전에는 흔치 않았던 여성 자동차 운전기사 김부영씨에 대한 이야기가 실렸다. 운전기사가 되기까지의 눈물겨운 도전의 과정이 담겨 있다. 그 이야기를 따라 100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세상은 자꾸 변해 간다. 여자로서 차관(次官)도 생기고 지사(知事)도 생기고 대의사(代議士)도 생기며 또는 근육 노동에 이르러도 남자와 일반으로 하늘에서 나는 재주, 땅에서 화살같이 달아나는 재주를 부리게 되었다, 더욱이 여사는 밥 한 그릇도 번쩍 들지 못하고 허리가 한 줌이나 되어 빼들빼들하여야만 귀부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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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4월 26일 각 신문에 ‘창덕궁 전하 승하(昇遐)’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려있다. 그는 조선 최후의 군주인 순종 임금이다. 전국은 깊은 애도 분위기에 휩싸였다. 그 와중에 창덕궁 금호문(金虎門) 의거가 발생했다. 이는 사이토 마코토 조선총독 암살 시도 사건이었다. 5월 2일자 동아일보를 보자. “지난 4월 28일 오후 1시 10분에 경성부 평의원 고산효행(高山孝行), 좌등호차랑(佐藤虎次郞), 지전장차랑(池田長次郞) 등 3명이 택시 자동차를 타고 창덕궁으로부터 금호문(金虎門)으로 나와 와룡동 창덕궁 경찰서장 관사 앞까지 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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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침몰 사고로 304명이 희생된 비극은 여전히 깊은 상흔으로 남아 있다. 100년 전 4월에도 이런 참담한 사건이 있었다. 공식적으로 68명의 어린 학생들이 익사한 황해도 용당포(龍塘浦) 앞바다 조난 사고다. 1924년 4월 26일자 매일신보를 보자. “4월 25일 오후 1시 황해도 용당포에 정박 중인 구축함 관람을 하기 위하여 해주(海州), 석동(席洞), 서종(西鐘)보통학교 등 3개 학교와 동아강습소 생도 등 200여 명이 1톤쯤 되는 배를 타고 구축함에 가까이 갔을 때에, 마침 바람이 불어서 구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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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지사(志士) 조정구(趙鼎九)는 일본 귀족 작위를 거부하고 스스로 죽음을 택하려 했던 결연한 인물이었다. 망명과 은거를 오가며 청빈 속에 생을 마친 그의 삶은 나라 잃은 지식인의 고뇌와 결단을 응축해 보여준다. “일찍이 일본 정부로부터 주는 남작(男爵)을 맡지 않고 뜻 같지 못한 세상을 떠나고자 자문(自刎·자기 목을 스스로 찌름)까지 하였으나 집안사람의 발견으로 마침내 목적을 달성치 못하고 스스로 처사(處士)가 되어 금강산(金剛山)과 중국 북경(北京) 등지로 표류하며 빛없는 세월을 보내던 조선 지사(志士) 조정구(67)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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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병인년(丙寅年) 동아일보는 ‘10년을 하루같이’라는 제목으로 한 분야에서 10년 이상 일해온 사람들을 연속해 소개했다. 한 자리를 지키며 세월을 견디는 사람들의 삶을 담은 것이다. 이름 없는 노동이 쌓여 한 시대의 얼굴을 만들어냈다. 첫 번째는 34년 동안 활판소에서 인쇄공으로 일하고 있는 조병문(趙炳文)씨 이야기다. “조선에 처음으로 활판이라는 인쇄 기계가 일본으로부터 건너오던 날부터 인쇄 직공이 되어 오늘까지 34년 1만여 일 동안을 하루같이 꾸준히 종사한 사람이 있으니 이는 대동(大東)인쇄 주식회사 정판과장(整版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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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2월, 조선일보 지면에 ‘상의’(相議)라는 독자 상담 코너가 실렸다. 독자가 편지로 궁금한 사항이나 고민 거리를 보내면 기자가 답을 달아주는 형식이다. 오늘날의 포털 검색이나 익명 커뮤니티가 없던 시대, 신문은 단순한 정보 전달 매체를 넘어 삶의 길잡이였다. 사람들은 신문에 묻고, 신문은 이에 답했다. 한 과부의 사연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개가(改嫁)하는 것이 어떨지 묻는다. “저는 올해 서른 세 살이 되는데 스물 두 살 때에 시집을 가서 10년 동안을 아무 일 없이 지내다가 설흔 살 되던 해 봄에 남편이 별안간 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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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인(美人)이란 용모가 아름다운 여자를 말한다. 미인은 동서(東西)와 고금(古今)에 따라 그 기준이 다르다. 그렇다면 100년 전 미인은 어떠했을까? 당시 조선일보에 ‘미인 예찬’이란 제목으로 소개된 8명의 미인을 만나러 한번 떠나보자. 첫 번째 소개하는 미인은 황온순(黃溫順·26) 여사다. “지난 2월 1일 오후에 먼저 미인 많기로 유명한 정동 이화학당에 발길을 옮겼다. 분홍 저고리, 연두 저고리 찬란한 옷을 입은 수백 처녀들. 그중에는 분홍 짜켓을 입고 말없이 생긋생긋 눈웃음만 치며 나오는 한 여성이 있었다. 마치 달빛에 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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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AI)이 일자리를 대체하면서 직업의 수명이 짧아지고 있다. 내 일자리가 사라질 수 있다는 불안도 일상이 됐다. 그러나 100년 전 신문 속에는 10년을 하루같이 근무해온 이들이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펼쳐본다. 병인년(丙寅年·1926년) 새해 첫달 동아일보에는 ‘10년을 하루같이’라는 제목으로 한 분야에서 10년 이상 근무 중인 사람을 소개하는 기사가 실려있다. 먼저 ‘교단에서 20년 성상(星霜) 중등 교원 장응진(張膺震)’이란 제하의 기사를 보자. “선생은 실로 조선 사람으로서 일본 고등사범을 제일 먼저 졸업한 사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