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아 도시 스토리 텔러
방치된 과실이 던지는 뜻밖의 질문들
산골 밤밭에서 발견한 작은 ‘허락’의 힘
거둘 이 없는 풍요에서 찾은 나눔의 길
사람 떠난 자리, 다시 생각하는 공동체
얼마 전 아는 어르신의 밤 농장에 갔다. 어르신은 도시로 떠나셨다. “밤이 많이 떨어졌을 테니 얼른 가서 주워 가라”면서 어차피 당신은 관리를 못 하신다고 하셨다.
밤 농장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깊은 산속이었다. 으름에 칡넝쿨에 각종 넝쿨이라는 것들이 뒤엉켜 사뭇 원시림 같기도 했다. 그런 곳에서도 용케 살아남아 밤톨을 맺다니. 왕 눈깔사탕만큼이나 크고 윤기가 흐르는 매우 먹음직스러운 밤이었다.
수확하는 기쁨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넝쿨 사이를 지나 한참 밤송이를 까고 알밤을 주웠다. 넝쿨이 나무를 온통 뒤덮고 있어 알밤을 줍다 말고 넝쿨 정리를 시작했다. 엉켜있는 넝쿨들을 쳐내 사람이 다닐 만한 길도 내고, 손바닥만큼이라도 하늘이 보이도록 정리를 한 후 사진을 한 장 찍어 어르신께 보내드렸다.
정리를 하고 나니 주변에 노오란 등을 환하게 켠 듯한 감나무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잘 익고 아름답게 열린 열매들이 사람의 손길을 기다리다 땅에 툭툭 떨어지고 있었다. 가만 보니 밭 하나가 아니었다. 그 길 일대가 전부 그랬다. 한때는 곶감 농사를 많이 지었던 곳이다. 이제는 돌보는 이 없는 농장이 적지 않다. 주인은 있지만, 나이가 들고 힘에 부치면서 농장을 떠난 이들이 늘어나는 것 같다. 열매는 여전히 풍성한데 그것을 거둘 손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산골 밭에서만 벌어지는 풍경은 아닐 것이다.
우리 동네에도 감나무와 모과나무가 적지 않다. 가을이면 담을 넘어온 가지에 감이 익고, 노랗게 익은 모과가 툭툭 떨어져 길 위를 굴러다닌다. 한두 알 가지에 매달렸을 때는 그리도 예뻐 보이던 것이 며칠이 지나면 달라진다. 차바퀴에 눌린 감이 바닥에 붙고, 터진 과육에는 벌과 작은 벌레들이 모여든다. 모과는 사람들의 발끝에 채여 이쪽저쪽으로 굴러다닌다. 사람들은 그것을 줍기보다 밟지 않으려고 피해 걷는다. 나무에 매달려있을 때와는 처지가 딴판이 되어 치워야 할 것이 된다.
그렇다고 지나가는 사람이 선뜻 주워 갈 수도 없다. 담 밖에 떨어졌다고 내 것은 아니다. 집주인이 따지 않는다고 가져가도 된다는 뜻도 아니다. 혹시 주인이 나중에 거두려고 남겨둔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주인도 거두지 않고 이웃도 손대지 않는 시간이 쌓여간다. 그러다 시골에서는 밤과 감이 나무 아래에서 썩고, 도시에서는 감과 모과가 길 위에서 썩는다.
시골의 밭과 도시의 담은 장소는 달라도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소유는 분명한데 돌볼 손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다른 사람이 자연스럽게 대신할 수 있게 해주는 관계도 함께 사라졌다.
우리의 공간은 소유의 경계를 정하는 데에는 익숙하다. 담이 있고 대문이 있고 필지가 있다. 누구의 땅이고 누구의 나무인지도 정해져 있다. 그런데 소유자가 더 이상 돌볼 수 없게 되었을 때, 그 공간과 소유자가 아닌 다른 사람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빈틈이 존재한다. 돌봄의 관계가 없어진 것이다.
사람이 거두지 않는다고 나무는 열매 맺는 일을 멈추지는 않는다. 나무의 소유는 분명하다. 가을이 담 안에만 머물지는 않는다. 가지가 담을 넘고 향기가 담을 넘고 열매도 담을 넘어가다가 결국 떨어진다. 풍경에는 경계가 없다. 문제는 그 풍경이 길 위로 떨어진 열매가 되었을 때다.
밤 농장에서는 어르신의 그 한마디가 경계를 허물어주었다. “주워 가.” 같은 밤이라도 그 말이 있으면 이웃의 인심이 되고, 말없이 가져가면 남의 것을 가져가는 일이 된다. 밤이 달라진 것도, 나무가 달라진 것도 아니다. 달라진 것은 그 밤을 향해 손을 내밀어도 된다는 허락이었다.
도시에서도 그렇게 간단할까. 담에 ‘필요한 분은 주워 가세요’라는 종이 한 장을 붙이면 되는 일일까. 누가 가지에 손을 대거나 열매를 줍다 다치면 어떻게 할 것인지, 필요한 만큼은 어디까지인지, 낯선 사람이 집 가까이 머무는 것을 주인은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을지 생각하면 이야기는 금세 복잡해진다. 소유의 경계를 여는 일이 말처럼 그리 간단하지 않다.
그래서 흥미로운 것이 ‘글리닝’(gleaning)이다.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의 갈리아노섬이나 밴쿠버섬의 앨버니 밸리 등에서는 주인이 미처 거두지 못한 열매를 자원봉사자들이 허락을 받고 수확하는 활동이 이어져 왔다. 수확물을 땅 주인과 참여자, 지역의 식량 지원 단체가 나누는 방식이다. 단체가 현장을 관리하고 보험을 마련하는 곳도 있다.
눈여겨볼 만한 것은 열매를 나눈다는 사실보다 그사이에 연결고리가 하나 더 있다는 점이었다. 주인과 가져가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사이에서 주인의 허락을 구하고, 사람을 모으고, 수확의 범위를 정하는 누군가가 있다. 안심하고 나눌 수 있도록 신뢰의 다리를 놓아주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에게 없는 것은 열매도, 그것을 원하는 사람도 아니라 그 둘 사이를 이어주는 관계인지도 모른다.
사진을 보신 어르신은 고생만 하고 온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고, 오히려 고맙다고까지 하셨다. 밤을 가방 한가득이나 얻었는데 말이다.
그날, 어르신과 우리 일행 사이에는 중간에 누군가가 필요하지 않았다. 서로 얼굴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시는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담을 맞대고 사는 곳이다. 그곳에서는 그 한마디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며칠 뒤에도 동네를 걷다 보면 감은 바닥에 떨어져 있을 것이고 모과는 길 위를 대굴대굴 굴러다닐 것이다. 누군가는 그것을 피해 걸을 것이고, 누군가는 치울 것이다. 나 역시 피해 지나칠 것이다. 밤밭에서는 “주워 가”라는 한마디면 충분했다. 도시에서도 그럴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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