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취임 첫 기자간담회서 미중 패권 관련 언급

中, 강력 지원·대규모 이공계 인력, 996문화 등 영향

ETRI R&D, 인간 중심 국가 임무형 연구기관 탈바꿈

박세웅 ETRI 원장이 29일 대전 본원에서 열린 기자 간담회에서 향후 기관 운영계획과 방향 등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ETRI 제공.
박세웅 ETRI 원장이 29일 대전 본원에서 열린 기자 간담회에서 향후 기관 운영계획과 방향 등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ETRI 제공.

박세웅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원장

“2주 전 중국 출장을 다녀온 뒤 가장 크게 느낀 건 이대로 10년이 지나면 중국 과학기술이 미국을 앞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효율을 높이고, 다른 나라들과 어떻게 협업해 우리의 주도권을 확보하느냐가 국가적 생존전략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세웅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은 지난 29일 대전 본원에서 열린 취임 후 첫 기자 간담화에서 미중 기술패권 경쟁 속 대한민국의 생존전략은 ‘효율과의 싸움’이라고 이같이 강조했다.

지난 5월 취임한 박 원장은 서울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펜실베니아대 시스템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통신 네트워크와 AI·ICT 분야 전문가다. 미국 AT&T 벨 연구소 연구원을 거쳐 1994년부터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로 재직중이다.

박 원장은 “지금은 미국이 중국을 앞서 있지만 중국 정부의 강력한 지원과 세계 톱 글래스 수준의 우수한 이공계 인력, 주 6일·하루 12시간 이상 일하는 ‘996 문화’가 10년간 이어진다면 중국이 미국을 앞지를 게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박세웅 ETRI 원장이 29일 대전 본원에서 열린 기자 간담회에서 향후 기관 운영계획과 방향 등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ETRI 제공.
박세웅 ETRI 원장이 29일 대전 본원에서 열린 기자 간담회에서 향후 기관 운영계획과 방향 등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ETRI 제공.

그는 이런 중국의 힘을 산술로 풀어 설명했다. 중국은 우리보다 30배 많은 이공계 우수 인력이 2배 더 열심히 일하고, 여기에 더해 2배 더 똑똑한 인재들이 2배 더 열심히 일하는 상황이라고 짚었다.

한국의 이공계 배출 인력은 연간 20만명에 달하지만, 중국은 500만명 가량으로 추산된다.

그는 “숫자로 보면 중국에 비해 우리가 가진 힘은 ‘1’ 정도 밖에 안 되기 때문에 이 ‘1’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쓰느냐가 우리의 미래 경쟁력을 좌우하는 관건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미중을 제외한 일본과 독일, 영국 등 나머지 국가들과 연합해 우리가 주도권을 갖고 미중 기술패권에 대응하는 전략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정부가 추진하는 ‘소버린 인공지능(AI)’도 이런 맥락에서 방향을 잘 잡아가고 있다고 평가했다.

박 원장은 ETRI가 나아갈 청사진도 제시했다.

연구자가 연구에 몰입하고, 국가가 필요로 하는 큰 연구에 도전하며, 국민 삶을 실질적으로 바꾸는 데 기여하는 ‘국가임무 중심 연구기관’으로 대전환하겠다는 것이다.

그는 “AI 중심으로 과학기술 패러다임이 빠르게 바뀌고, 연구과제중심제도(PBS) 폐지 등 출연연을 둘러싼 연구환경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고 있다”며 “ETRI는 AI·DX혁신을 통해 함께 사는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데 역량을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그 중심은 인간에 가치를 둔 연구개발(R&D)이다.

박 원장은 “기술이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특이점에 가까워질수록 ‘기술이 얼마나 뛰어난가’보다는 ‘기술이 인간에게 어떤 가치를 주는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면서 “ETRI는 인간 중심에 가치를 두고 기술을 개발하고 발전시켜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 ETRI는 시각장애인의 이동을 도와 주는 ‘안내 로봇’을 조만간 선보일 예정이다.

박 원장은 지난 30년간 PBS 기반 R&D 체질을 근본적으로 혁신하겠다고 밝혔다.

PBS 폐지를 계기로 연구사업 구조를 기존 경쟁력 수탁과제 중심에서 기관 고유 임무와 국가 전략임무 중심의 ‘임무형 R&D 체계’로 전환한다는 계획이다.

박세웅 ETRI 원장이 29일 대전 본원에서 열린 기자 간담회에서 향후 기관 운영계획과 방향 등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ETRI 제공.
박세웅 ETRI 원장이 29일 대전 본원에서 열린 기자 간담회에서 향후 기관 운영계획과 방향 등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ETRI 제공.

그는 “그동안 ETRI는 과제를 따기 위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썼다면 앞으로는 ‘어떤 과제를 따올 것인가’가 아니라 ‘국가가 ETRI에 맡긴 임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고민하도록 연구자의 인식과 자세를 바꾸겠다”고 설명했다.

ETRI가 해야만 하고, 가장 잘 할 수 있는 연구에 집중하겠다는 얘기다.

이를 위해 임무형 연구사업 비중은 올해 22%에서 2030년까지 90%로 끌어 올리고, 경쟁형 수탁사업은 현재 78%에서 2030년까지 10%로 줄여 나갈 방침이다. 출연금 인건비 비중도 단계적으로 높여 연구자들이 과제 수주 경쟁보다는 연구 자체에 집중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예정이다.

ETRI는 앞으로 △AI △피지컬 AI △입체통신 △공간 결합 △AI디지털전환(ADX) 등 5대 중점 분야에 연구역량을 모은다.

특히 AI 분야에서는 멀티모달 파운데이션 모델과 AI 과학자, AI 고속도로, 로봇 파운데이션 모델(RFM) 등에 주력한다.

또 반도체부터 컴퓨팅, 거대언어모델까지 아우르는 특화된 ‘AI 풀스택 사업’, 전국의 소규모 AI 데이터센터를 ‘AI 고속도로’로 묶어 하나의 클라우드처럼 쓰는 ‘분산형 AIDC’, ‘AI 과학자·자율실험실’, ‘우주 AIDC’, ‘촉각센서와 3D비전을 융합한 로봇손’ 등을 내년부터 전략연구사업으로 추진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박 원장은 기술혁신과 경영혁신 전략으로 ‘4E 콤비내이션’(Combination)을 제시했다.

4E는 △본질적 혁신 △개방형 포용 △연구활력 제고 △탁월한 성장을 뜻한다.

우선 본질적 혁신을 통해 국가혁신 성장엔진과 R&D 체질 혁신을 이루고, 개방적 포용으로 개방형 R&D 플랫폼과 상생협력을 확대한다.

연구활력 제고로 연구 본능과 연구 활력을 되살리고, 탁월한 성장으로 세계가 인정하는 질적 연구성과와 글로벌 영향력을 확대하겠다는 구상이다.

박 원장은 “연구자가 가진 가능성과 연구 본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판을 만들어 ETRI가 AI·DX R&D 플랫폼이자 국가 지능화 혁신 엔진으로 대한민국 미래를 설계하는 연구기관이 되겠다”고 말했다.

이준기 기자 bongchu@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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