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균 편집국장
빈 살만 왕세자가 결국 자동차를 만들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지난 21일(현지시간) 자국 최초의 자동차 브랜드 '시어'(CEER)의 첫 자동차 '엑소봇'(EXOBOT)을 공개했다. 석유 왕국의 첫 차는 전기차다. 석유로 굴리는 내연기관차가 아니다. 세단과 SUV 두 모델이다. 2030년까지 7개 모델로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본격적인 판매는 내년부터다.
성공을 외치기에는 이르다. 자동차는 제품만 덜컥 내놓는다고 열매가 열리는 산업이 아니다. 수십 년간 축적된 부품 생태계와 품질관리, 생산기술, 판매망, 브랜드 신뢰가 필요하다. 전기차라고 해서 이 장벽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빈 살만의 '전기차 굴기'를 가볍게 볼 수 없다. 자동차 한 대를 만든 것이 아니라 석유시대 이후의 국가를 만들기 위한 첫 번째 산업 플랫폼을 꺼내 들었기 때문이다. 시어는 사우디국부펀드(PIF)와 대만 폭스콘의 합작으로 출발했다. BMW·현대자동차그룹을 연결, 생산·기술·부품을 아우르는 글로벌 공급망을 완성했다. 사우디가 모든 것을 처음부터 직접 하겠다는 오만을 버린 것이다. 이것이 빈 살만의 방식이다.
석유로 번 돈을 그냥 쌓아놓지 않는다. 돈을 기술과 기업, 인재와 산업 생태계로 바꾸려 한다. 자동차를 만들면서 설계·소프트웨어·배터리·부품·생산·서비스 산업을 함께 키우려 한다. 전기차는 목적지가 아니라 국가 산업을 바꾸는 수단인 셈이다.
빈 살만이 던진 질문은 간단하다. 석유가 영원히 사우디를 먹여 살릴 것인가. 석유로 쌓은 부를 석유 이후의 경쟁력으로 바꿀 수 있는가. 석유가 사라진 뒤에도 사우디가 세계의 중심에 남을 수 있는가. 이번 전기차는 그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이다.
사우디의 도전이 성공할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우리는 그동안 막대한 자본을 투입한 자동차 산업 육성 시도가 맥없이 무너지는 사례를 여러번 목격했다. 그러나 국가가 미래 산업의 미래에 대해 에 대한 첫 질문은 언제나 제품 하나의 성공 여부보다 크다.
한국을 돌아보자. 한국도 지금 '포스트 반도체'를 고민하고 있다. 반도체 슈퍼사이클은 한국 경제에 엄청난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특정 산업의 호황이 영원할 수는 없다. 반도체 이후에 대한 답을 제대로 준비하지 않는다면 호황은 오히려 미래를 망치는 마취제가 될 수도 있다.
이재명 정부도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AI 3강'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문제는 실행이다. 한국이 사우디에서 배워야 할 첫 번째는 '돈을 많이 쓰는 법'이 아니다. 국가가 미래 산업을 하나의 생태계로 보는 법이다. AI를 키운다면서 당장 그래픽처리장치(GPU) 몇 장을 확보하고 데이터센터 몇개 짓는 것으로 그쳐선 안 된다. AI 반도체에서 데이터센터, 모델, 소프트웨어, 로봇, 공장, 물류, 조선, 자동차까지 하나의 산업 가치사슬을 만들어야 한다. 정부도 이렇게 방향을 잡았다. 다행이다.
기업의 경계를 넘나드는 연합전선도 구축해야 한다. 사우디처럼 한국도 삼성전자, SK하이닉스, 현대차, HD현대, 한화, LG 등 각자의 기술을 가진 기업을 AI라는 하나의 산업 플랫폼에서 연결해야 한다. 대기업만의 AI가 되어서는 안 된다. 부품·장비·소프트웨어·스타트업까지 연결해야 산업 생태계가 된다.
AI 경쟁은 결국 사람의 경쟁이다. 세계 최고 인재를 모셔오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국내 인재가 떠나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연구자가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제도를 뜯어 고치고, 기업이 세계 인재를 채용할 수 있도록 노동·비자·보상 체계를 현실화해야 한다.
규제 혁파도 필수적이다. 규제를 산업의 적이 아닌 실험의 안전장치로 다시 설계해야 한다. AI와 로봇, 자율주행, 의료 AI 같은 첨단 산업은 기존 규제 체계와 충돌할 수밖에 없다. 모든 규제를 풀자는 얘기가 아니다. 안전과 개인정보·보안처럼 지켜야 할 것은 더 엄격하게 지키되, 나머지는 실제 현장에서 실험하고 검증할 수 있도록 규제의 문턱을 확 낮춰야 한다.
무엇보다 정부는 '지원자'에서 '첫 고객'으로 변신해야 한다. 피지컬 AI를 키우겠다면 정부와 공공기관이 실제 수요자가 돼야 한다. AI 로봇이 필요한 공장, AI 물류가 필요한 항만, 자율주행이 필요한 도시, AI 의료가 필요한 병원에서 실제 서비스를 구매하고 검증해야할 것이다. 기술을 개발한 뒤 시장을 찾는 방식이 아니라 시장을 만들어 기술을 키우는 방식으로 바꿔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간을 견디는 산업정책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산업 이름을 붙이고 기존 사업을 뒤집는 방식으로는 미래산업을 만들 수 없다. AI는 5년짜리 프로젝트가 아니다. 반도체처럼 10년, 20년을 내다보고 인프라와 인재, 기업 생태계를 키워야 한다.
빈 살만은 석유시대 이후의 스토리를 쓰고 있다. 이재명 정부 역시 AI 3강 비전 토대로 반도체 이후의 시대를 준비하고 있다. 빠르게 움직이되 돌다리도 짚어야 하고, 지킬 것은 지키되 나머지는 과감히 풀어야 한다. 무엇보다는 거창한 구호보다, 실행력을 앞세워야 한다.
김화균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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