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선두기업이 띄운 '풍선'… 후발엔 '규제포획 발생' 우려
트럼프·젠슨 황은 정면으로 반기 "美 주도권 中에 빼앗겨"
오바마·해리스 등 민주당 인사 "심각한 안전 문제 대응해야"
中도 "전례 없는 속도·범위·깊이로 각 부문에 침투" 우려
미·중 각축 속 유럽도 "막대한 투자에 우리만 배제될 위기"
'인공지능(AI) 속도조절론'이 미국을 넘어 세계적인 논쟁으로 번지고 있다. 인간의 통제를 벗어날 수 있는 AI의 위험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가 쟁점이지만, 그 이면에는 미중 기술패권과 기업의 수익성, 규제 주도권, 후발주자의 추격을 둘러싼 복잡한 셈법이 작동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엔비디아의 젠슨 황 최고경영자(CEO)는 다리오 아모데이 앤트로픽 CEO와 샘 올트먼 오픈AI CEO 등의 속도 조절론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14일(현지시간) AI의 인류멸망 가능성을 제기하는 주장을 '사기'라고 비판하면서 "AI에서 이기는 자가 승리할 것"이라며 중국과의 경쟁에서 속도를 늦춰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밝혔다.
황 CEO 역시 같은 날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올인 서밋'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공개 통화하며 AI 개발 속도를 늦추는 움직임에 반대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속도 조절론은) 사기"라며 "우리는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두지 않을 것"이라고 하자, 황 CEO는 "맞습니다. 우리는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놔두지 않을 겁니다"라고 화답했다.
AI용 고성능 반도체와 데이터센터에 대한 투자가 AI 개발 속도와 직결되는 만큼 엔비디아로서는 개발 경쟁이 계속될수록 유리하다. 데이터센터·서버·메모리·전력·냉각 등 AI 인프라 산업 전체도 같은 이해관계를 공유한다.
사실 속도조절이 반드시 AI 기업에 불리한 것도 아니다. AI 모델 훈련과 컴퓨팅에 투입되는 천문학적인 비용을 줄이고 기존 서비스에서 발생하는 매출을 유지한다면 오히려 이익률을 높일 수 있다.
이 때문에 AI 선두기업이 안전을 명분으로 규제 기준을 주도할 경우 후발주자에게 진입장벽을 세우는 '규제포획'(regulatory capture)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거대 AI 기업에는 감당할 수 있는 안전성 검증 비용이 스타트업에는 시장 진입을 막는 장벽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선두기업이 후발주자가 올라오는 사다리를 걷어차는 것 아니냐는 시각이 나오는 이유다.
미국 정치권도 입장이 갈린다. 민주당은 트럼프 대통령의 'AI 질주'에 우려를 제기한다. 공화당 내에서도 미묘한 입장차가 드러난다. 공화당 소속 마이크 존슨 하원의장은 14일 AI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한 안전장치 입법에 찬성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단 AI의 위험을 통제하면서도 중국에 대한 우위를 유지해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과 카멀라 해리스 전 부통령도 AI 규제론에 가세했다. 이날 CNN에 따르면 오바마 전 대통령은 성명을 통해 "정부와 정치권은 AI와 관련한 심각한 안전 문제에 대응하고, 일자리와 어린이들에게 미칠 영향을 예측해야 한다"고 밝혔다. 2028년 대선에서 재도전 가능성이 거론되는 해리스 전 부통령은 엑스(X)에서 "AI의 최첨단 기술이 우려스러울 정도로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며 "개발 속도를 늦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만 민주당 역시 중국과의 AI 경쟁에서 미국의 주도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데에는 공화당과 큰 차이가 없다.
중국에서도 AI의 통제 불능 위험성에 대한 정부 차원의 경고가 잇따르고 있다. 중국 국가안전부 천이신 부장(장관)은 최근 공개된 글에서 "AI 발전에 따른 위험·도전을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며 "AI가 전례 없는 속도·범위·깊이로 인류사회의 각 부문에 침투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구체적인 국가를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상당 부분 미국을 겨냥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AI의 위험성을 인정하면서도 아직은 관리 가능한 수준으로 두고 미국과의 기술 격차를 좁히는 데 무게를 두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미중 양국이 AI 안전에 관한 합의를 한다고 해도 실제 속도조절이 가능할지는 회의적이다. 서로 상대방이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확신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개발을 늦추면 상대방이 앞서갈 수 있기 때문이다. '죄수의 딜레마'가 AI 경쟁에도 적용되는 셈이다. 오는 24일 예정된 미중 정상회담에서 AI 안전 문제가 논의될 지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유럽은 이 논쟁에서 더욱 절박하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14일 미국과 중국이 AI에 막대한 투자를 쏟아 붓는 사이 유럽이 배제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지난해 미국에서 개발된 AI 주력 모델이 59개, 중국이 35개였던 데 비해 프랑스와 영국은 각각 1개에 그쳤다. 세계 AI 컴퓨팅 용량에서도 미국의 비중은 75%인 반면 유럽은 5%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AI가 향후 10년간 경제 생산성을 최대 4% 높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유럽으로서는 속도조절보다 오히려 컴퓨팅 인프라 확충이 시급한 상황이라고 주장했다.
AI 파멸 가능성에 대한 전문가들의 전망도 극단적으로 갈린다. 로만 얌폴스키 루이빌대 교수는 위험 가능성을 99.99% 수준으로 보는 반면, 'AI 3대 구루' 가운데 한 명인 얀 르쿤 뉴욕대 교수는 0.01% 미만으로 평가한다. 대규모언어모델(LLM)의 아버지로 불리는 제프리 힌턴 토론토대 교수와 요슈아 벤지오 몬트리올대 교수는 AI로 인한 파멸 가능성을 10~20% 수준으로 제시해왔다.
결국 불투명한 AI 위험성 아래서 세계는 길을 고민하고 있다. 선두기업에는 속도조절이 비용 절감과 시장 지배력 강화의 기회가 될 수 있고, 후발국에는 추격의 마지막 사다리가 될 수 있다. 미국에는 중국과의 경쟁에서 자칫 방심이 될 수 있고, 중국에는 미국의 빈틈을 노릴 기회다. 유럽과 한국 등 제3국들에는 경쟁에서 탈락하지 않기 위한 생존의 문제다.
이규화 대기자 david@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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