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승 단국대 경영대학원장
최근 한국 경제는 GDP(국내총생산) 성장률 개선과 수출 호조 등 거시지표에서 의미 있는 회복 흐름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기업 현장과 자본시장이 체감하는 온도는 여전히 차갑다. 상반기 기업공개(IPO) 시장은 위축됐고, 인수합병(M&A) 시장도 기대만큼 활력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그 배경에는 강화된 IPO 심사와 공정거래위원회의 엄격해진 기업결합 심사가 자주거론된다. 거시경제의 회복 신호가 실제 투자와 거래의 활력으로 이어지려면 기업이 움직일 수 있는 제도적 여건도 함께 뒷받침돼야 한다.
현재 어펄마캐피탈의 도레이첨단소재 FCCL 사업부 인수, 네이버파이낸셜과 두나무의 결합, 우버의 딜리버리히어로 인수 등 여러 대형 거래가 심사대에 올라 있다. 공정위는 자료 보완 기간을 제외한 순수 심사 기간은 예년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입장이다. 그 설명은 일리가 있다. 기술 융합이 가속화되고 시장 경계가 흐려지는 상황에서 과거의 단순한 잣대만으로 경쟁 제한성을 판단하기는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플랫폼과 데이터, 금융과 기술처럼 서로 다른 산업이 결합하는 거래일수록 경쟁의 범위와 미래 효과를 가늠하는 일은 더욱 복잡하다.
그러나 문제는 행정의 판단이 어려워질 만큼 시장의 변화 속도가 훨씬 빨라졌다는 데 있다. 심사와 보정 절차가 길어지는 사이 기업은 투자와 구조조정의 적기를 놓칠 수 있고, 글로벌 경쟁사에 시장 주도권을 내줄 수도 있다. 특히 기술 주기가 짧은 첨단·신흥 산업에서는 몇 달의 지연이 곧 경쟁력의 격차로 이어진다. 기업 입장에서 ‘시간’은 단순한 절차상의 변수가 아니라 비용이며, 때로는 생존 그 자체다. 규제기관의 한 달과 시장의 한 달은 같은 길이일 수 있지만, 그 경제적 무게까지 같은 것은 아니다.
심사 장기화가 초래하는 비용은 개별 기업에 그치지 않는다. 딜 클로징의 불확실성이 커지면 자금조달 비용이 높아지고 투자자의 위험회피 성향도 강해진다. 거래 당사자뿐 아니라 인수금융, 사모펀드, 벤처투자, IPO로 이어지는 자본의 흐름 전체가 영향을 받는다.
이는 결국 투자 집행 감소와 거래 위축으로 이어져 자본시장의 선순환을 약화시킨다. 기업가치를 높이고 산업 재편을 촉진하겠다는 국가적 ‘밸류업’ 노력 역시 절차적 불확실성에 가려질 수 있다. 규제의 예측 가능성과 처리 속도 역시 국가 경쟁력의 중요한 일부인 이유다.
시장은 정지된 사진이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는 동영상이다. 아직 결합하지 않은 두 기업이 5년, 10년 뒤 어떤 시장구조를 만들지, 소비자 후생에 어떤 영향을 줄지를 사전에 완벽히 예측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쉽지 않다. 미래의 잠재적 폐해를 막기 위해 심사를 지나치게 길게 끌 경우, 정작 현재의 혁신과 성장 기회를 소진할 위험도 있다. 규제의 목적이 경쟁을 유지하는 데 있다면, 그 과정이 새로운 경쟁과 혁신의 탄생 자체를 막아서는 곤란하다. ‘잘못 승인할 위험’만큼이나 ‘너무 늦게 승인할 위험’도 함께 따져야 한다.
필요한 건 ‘심사의 완화’가 아니라 ‘심사의 방식 전환’이다. 경쟁 제한 우려가 낮거나 사후 시정이 가능한 사안은 신속한 선승인을 통해 시장 진입과 구조개편의 골든타임을 보장하고, 실제 독점적 폐해나 불공정 행위가 나타날 경우에는 정교한 후규제로 책임을 묻는 체계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
필요하다면 조건부 승인, 신속심사, 사후 모니터링 같은 수단을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해 사전 판단의 부담을 분산할 수도 있다. 우리나라는 이미 상당한 수준의 사후 규제 수단과 시장 감시 체계를 갖추고 있다. 이를 적극 활용한다면 속도와 공정성은 반드시 양자택일의 관계일 필요가 없다.
지금 시급한 것은 느슨한 규제가 아니라 똑똑한 규제다. 시장보다 한발 늦게 움직이는 규제가 아니라, 시장의 속도를 이해하면서도 경쟁 질서를 지켜내는 규제여야 한다. 공정위가 ‘심사의 깊이’와 ‘시장의 속도’ 사이에서 보다 지혜로운 균형점을 찾을 때, 기업의 혁신과 자본의 역동성, 그리고 소비자 후생이 함께 살아날 수 있다.
실시간 주요뉴스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