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최전선 인사들 잇따라 "속도 늦춰야"
트럼프 "AI 승자가 미래의 승자" 일축
존슨의장도 "규제 서두르면 中에 진다"
워싱턴, 안전보다 'AI 패권 유지' 무게
"멈추면 안전하지만 적이 앞설 수 있다"
미국의 인공지능(AI) 산업을 둘러싼 논쟁이 묘한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AI를 가장 빠르게 개발하고 있는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들이 이구동성 잇따라 "속도를 늦춰야 한다"고 경고하는 가운데, 정작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공화당 지도부는 정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미 IT 전문매체 더버지(The Verge)는 14일 이 같은 대립을 조명했다. 트럼프 대통령과 공화당 핵심 인사들은 AI 최전선 기업의 CEO들이 과민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입장이다. 공화당은 AI 개발 속도를 늦추면 중국이 우위를 차지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불과 하루 전인 12일에는 AI 업계의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앤트로픽의 다리오 아모데이 CEO는 장문의 공개서한을 통해 AI의 '프런티어'(frontier) 개발 속도를 늦추고 안전장치가 기술 발전을 따라잡을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독립적인 외부 평가기관이 AI 기업 내부의 개발 과정과 안전조치를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하고, 민주주의 국가들이 안전기준을 공동으로 마련하며, 장기적으로는 권위주의 국가까지 포함한 국제적 협력을 추진하자는 구상을 내놓았다.
이 제안에 오픈AI의 샘 올트먼 CEO와 일론 머스크가 공개적으로 호응했고, 구글 딥마인드의 데미스 허사비스도 조건부로 지지 의사를 나타냈다. 즉 AI 산업의 최전선 인사들이 동시에 "이제는 조금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내놓은 셈이다.
워싱턴의 반응은 달랐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이 이미 중국보다 AI에서 앞서 있다면서 "AI에서 승리하는 쪽이 승리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미국의 AI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 개발 속도를 늦추는 데 부정적인 입장을 보인 것이다.
공화당 소속 마이크 존슨 하원의장 역시 비슷한 논리를 폈다. 그는 CNN에서 의회가 AI를 규제하기 위해 긴급하게 움직인다면 오히려 미국이 중국과의 경쟁에서 패배할 수 있다며 "국가안보 위협"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AI 업계가 제기하는 위험을 무시한다기보다는, 규제가 미국의 기술적 우위를 훼손할 위험을 더 중대하게 보는 것이다.
여기서 이번 사태의 역설이 드러난다. AI 업계 CEO들은 누구보다 AI의 발전 속도를 잘 알고 있다. 동시에 이들은 자신들이 만든 모델이 예상보다 빠르게 자율성을 획득하거나 사이버공격 등에 활용될 가능성에 대해서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보고 있다. 실제 최근 AI 에이전트가 통제 범위를 벗어나 다른 시스템을 공격하거나 악성 행동을 수행한 사례가 잇따르면서 안전 논쟁은 '공상과학적 가정'에서 벗어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속도를 늦추는 순간 다른 기업이나 다른 국가가 앞서갈 수 있다는 점이 딜레마다. 여기서 '죄수의 딜레마'가 등장한다.
미국 인터넷 매체 악시오스는 AI 기업들이 개발 속도를 늦추는 문제를 이 같은 죄수의 딜레마로 설명했다. 모두가 동시에 속도를 늦추면 안전 측면에서 이익을 얻을 수 있지만, 한 기업만 멈추면 경쟁자에게 시장과 기술 주도권을 내줄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제 이 죄수의 딜레마가 기업을 넘어 국가 차원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이 AI 개발 속도를 늦추면 중국이 앞서갈 수 있다. 반대로 미국이 속도 경쟁을 계속하면 AI가 인간의 통제력을 넘어설 위험을 충분히 검증하지 못한 채 기술을 확산시킬 가능성이 커진다. 미국이 안전을 이유로 브레이크를 밟는 순간 중국이 액셀러레이터를 밟을 수 있다는 공포가 트럼프 행정부의 판단에 깔려 있는 것이다.
미국 언론은 이 진퇴양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최근 며칠간 미국 언론에서는 "AI 업계가 위험을 경고하는데 워싱턴은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부각됐다. 더버지는 반대로 "AI 업계가 지나치게 반응하고 있는 것 아니냐고 생각하는 워싱턴"을 부각했다. AI 기업 내부에서 안전에 대한 경고음이 커질수록 트럼프 행정부와 공화당의 뇌리에는 오히려 중국과의 기술 패권 경쟁이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물론 트럼프와 존슨의 논리가 전적으로 틀렸다고 보기도 어렵다. AI는 단순한 민간 산업을 넘어 반도체·클라우드·데이터센터·사이버안보·국방·정보전과 연결돼 있다. 백악관 역시 AI를 미국의 경제성장과 국가안보를 강화하는 핵심 전략으로 규정하고 있다.
문제는 '속도'와 '안전' 가운데 하나만 선택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이번 논쟁의 해법은 미국이 중국보다 먼저 강력한 AI를 만드는 것과 동시에, 그 AI가 초래할 위험을 관리할 수 있는 제도와 기술까지 먼저 구축하는 것이다. 안전을 이유로 경쟁에서 이탈하는 것도 위험하지만,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안전장치를 뒤로 미루는 것 역시 위험하다.
결국 미국이 직면한 문제는 AI를 멈출 것인가, 달릴 것인가라는 선택이 아니다. '안전하게 빨리 달리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 답을 찾아야 할 가장 중요한 당사자들이 지금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AI 개발을 위해 그동안 매진해온 기업들이 이젠 "조금 늦춰야 한다"고 말하고, AI의 안전성을 지켜야 할 워싱턴은 "멈추면 중국이 추월한다"고 말하는 역설적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AI 경쟁이 기술 패권 경쟁을 넘어 국가안보와 인류의 안전 사이에서 벌어지는 새로운 지정학적 게임으로 변하고 있다.
이규화 대기자 david@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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