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만 한국마트협회 회장
전통시장과 편의점, 동네 마트 등 지역 상권 내 소규모 유통업체들은 단순히 물건만을 파는 곳이 아니다. 매일 아침 신선식품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주민들이 필요로 하는 상품을 공급하며, 가족 단위 고객들의 장바구니를 채워나가는 진정한 의미의 지역 주민 밀착형 생활 터전이다. 이런 연유로 지역 내 소규모 유통업체들의 활력 정도는 해당 지역 사회 전반의 역동성까지도 가늠해 볼 수 있는 바로미터로 인식되기도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런 지역 상권 내 소규모 유통업체들의 경영 여건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최저임금 인상과 이란 전쟁 장기화 등으로 대내외 경제 환경은 악화되고 있고, 인건비와 임대료, 원재료비 등은 계속 오르는 상황임에도 소비가 쉽게 살아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장에서는 시급한 상황 개선 대책을 기대하고 있지만, 정부와 국회에서는 최근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을 통한 대형마트의 새벽 배송 허용 움직임까지 가시화하고 있어 안타까움을 더한다. 법 개정 추진의 명분으로 소비자의 편의성을 높이고 규제를 개선해 유통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내세운다.
그러나 대형마트에 대한 새벽 배송 허용은 단순한 규제 완화나 당장의 소비자 편익만을 기준으로 접근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문제다. 분명히 지역 마트와 전통시장 그리고 골목상권 소상공인들의 생존과 관련되는 사안이고, 나아가 지역 상권 전체의 붕괴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도화선이 될 수 있다.
막대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전국적인 점포망과 물류, 마케팅 능력을 갖춘 대형마트들이 새벽 배송 서비스까지 제공하게 되면 지역 내 소규모 유통업체들의 매출은 급격히 줄어들 수밖에 없다. 특히 오랫동안 전통시장과 골목상권 소상공인들의 강점으로 인식되던 채소와 과일, 육류, 수산물 등 신선식품 시장까지도 거대 자본력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져버릴 가능성이 크다.
일각에서는 쿠팡 등 거대 온라인 플랫폼사들이 새벽 배송 서비스를 이미 제공하고 있는데 대형마트만 제한하는 것은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은 문제의 본질을 흐리는 잘못된 접근이다. 오랜 진통 끝에 사회적 합의를 통해 도입된 대형마트 영업규제에 대한 폐지를 주장할 것이 아니라 쿠팡 등 일부 대형 온라인 플랫폼사들의 과도한 시장지배력과 불공정 문제를 먼저 살펴야 한다.
대기업과 소규모 유통업체들이 공정한 환경에서 경쟁할 수 있도록 유통환경을 정비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대기업과 소상공인들이 어우러져 건전한 지역 유통 체제를 발전시키고자 하는 사회적 합의 정신은 계속 지켜져야 한다. 골목 상권과 전통시장 등 소규모 지역 유통 체계가 완전히 무너져 버리고 소수의 거대 온라인 플랫폼과 유통 대기업만 남아버린 상권에서는 소비자 선택권이 오히려 줄어들 수 있음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정부와 국회는 당장의 소비 편의성만을 중시할 것이 아니라 향후 5년, 10년 뒤 우리 유통시장의 체계까지 고려해 정책을 설계하여야 한다. 크고 작은 유통 주체가 함께 공존하면서 지역에서 벌어들인 돈이 다시 지역에서 소비되고 지역 주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지역 경제의 선순환은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 몇몇 대형 온라인 플랫폼과 대기업 마트들에게 전국의 지역 소비를 몰아주는 정책은 수도권과 지방, 대기업과 소상공인 간 양극화만 심화시킬 뿐이다.
또한 2012년 유통산업발전법 개정 과정에서 겪었던 엄청난 사회적 갈등이 재현되어서는 안 된다. 소상공인들과 대형마트 간의 충돌은 물론 취급 품목 제한을 둘러싼 지방정부와 대형마트 간 법적 공방에 더해 소위 ‘을(乙)들’이라는 소상공인과 농민 간의 갈등까지 겪었었다.
대형마트 새벽 배송 제한 규제는 단순한 규제 완화나 소비자 편의 문제가 아니다. 편리함을 내세워서 간신히 유지해 가는 지역 상권의 마지막 안전망까지 걷어내서는 안 된다. 이는 우리 사회가 어떤 유통생태계를 지향할 것인지, 그리고 소규모 유통업체들과 지역경제의 지속가능성을 어떻게 지켜낼 것인지에 대한 중요한 선택 문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새벽 배송 규제 완화가 아니라 크고 작은 유통기업들이 균형감 있게 발전해 나가도록 유통 질서를 재정립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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