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하니 전 대통령 “전쟁 지속 여부 국민에 묻자”

사실상 종전 국민투표 제안, 전쟁 피로감 치솟아

페제시키안 대통령·갈리바프 의장도 잇단 제안

인플레 80%대·통화가치 급락하며 민생 압박

군 강경파는 “위험한 발언” 반발… ‘항전’ 주장

하산 로하니 이란 전 대통령. AP 연합뉴스 자료사진
하산 로하니 이란 전 대통령. AP 연합뉴스 자료사진

미국과 이란의 전쟁이 장기 교착 국면에 빠진 가운데 이란 내부에서 전쟁을 언제, 어떻게 끝낼 것인지를 둘러싼 논쟁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미국이 막대한 군사력을 투입하고도 이란의 항복이나 핵·미사일 능력을 완전히 제거하겠다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가운데, 이란 역시 장기전으로 경제와 민생이 심각하게 훼손되면서 ‘끝까지 싸우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지는 아니라는 목소리가 정치권에서 점차 커지는 모습이다.

특히 이란의 온건·실용파를 대표하는 하산 로하니 전 대통령이 사실상 전쟁 지속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제안하면서 논쟁에 불을 붙였다.

이란 언론에 따르면 로하니 전 대통령은 최근 전직 지방 주지사들과의 회동에서 국가가 먼저 전쟁의 목표와 향후 전략을 명확하게 설정한 뒤 이를 국민에게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세계 강대국들과 앞으로 20년 더 싸우겠다는 계획을 국민에게 제시했을 때 국민이 받아들인다면 계속 싸우면 된다”며 “그러나 국민이 다른 길을 선택한다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있느냐”는 취지로 말했다.

로하니가 직접 ‘국민투표’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이란 언론과 외신은 사실상 전쟁 지속 여부에 대한 국민의 의사를 묻자는 제안으로 해석했다.

로하니는 특히 전쟁의 명분보다 전쟁 이후 이란 사회가 감당해야 할 비용을 강조했다. 전쟁으로 발생한 피해를 복구하고 청년과 투자자들에게 다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기 위해서는 대다수 국민의 뜻에 따라 ‘명예롭게’ 전쟁을 끝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소수의 강경한 목소리가 이란 전체 국민의 뜻을 대변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주장도 내놨다.

이는 미국에 굴복하자는 주장이 아니라 이란이 전쟁에서 얻을 수 있는 목표와 감당해야 할 비용을 냉정하게 계산해야 한다는 현실주의적 접근으로 해석할 수 있다.

실제로 로하니의 발언은 이란 정치권에서 완전히 고립된 목소리도 아니다. 마수드 페제시키안 대통령은 지난달 전쟁을 ‘힘과 존엄의 위치’에서 끝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그는 전쟁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수는 없다면서 이란이 자신의 조건을 지키면서 종전을 선택할 수 있다는 논리를 폈다.

의회 의장이자 미국과의 휴전 협상에 관여해온 모하마드 바게르 갈리바프 역시 군사력만으로는 국가를 유지할 수 없다는 취지의 발언을 내놨다. 그는 국민이 고통 받고 국내에서 돈이 돌지 않으며 경제가 성장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강력한 군사력을 갖고 있어도 국가를 발전시킬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란 지도부가 종전 얘기를 하는 것은 우선 경제 때문이다. 이란은 사실상 이란혁명 이후 47년간 미국의 제재와 구조적인 경제난을 겪어왔다. 여기에 올해 전쟁으로 주요 산업시설과 에너지 인프라가 타격을 입고,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싼 군사적 충돌과 미국의 해상 봉쇄까지 겹쳤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 7월 이란 경제가 올해 5.4% 역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전쟁이 종료될 경우 2027년에는 2.9% 성장할 수 있다는 전망도 제시했다. 전쟁이 경제의 회복 가능성 자체를 뒤흔들고 있다는 의미다.

실제 민생 압박은 더욱 심각하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이란의 물가상승률은 80%를 넘어섰으며, 리알화 가치는 급락 중이다. 미국의 제재와 해상 봉쇄로 석유 수출도 크게 줄었다. 로이터는 이란의 석유 수출량이 지난해 하루 약 170만배럴에서 최근 약 26만배럴까지 감소했다고 보도했다. 식료품 가격도 크게 상승했고 실업률 역시 높아지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최근에는 연료 부족까지 심각해졌다.

인명 피해 역시 이란 사회가 전쟁 지속 여부를 고민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다. 정확한 누적 사망자 규모는 집계 방식과 발표 주체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있지만, 전쟁이 시작된 이후 이란에서 수천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최근 미국의 공습이 재개된 뒤에도 이란 보건당국은 8월 30일부터 9월 2일까지 18명이 숨지고 142명이 부상했다고 밝혔다.

이 가운데는 호르무즈 해협 인근 결혼식장에서 발생한 사망자도 포함됐다. 여기에 군인은 포함되지 않았다.

전쟁 지속 여부를 국민투표에 부치려면 정치적으로 훨씬 높은 수준의 합의가 필요하다. 특히 최고지도자와 혁명수비대를 중심으로 한 강경 세력이 이를 받아들일지가 최대 변수다.

그럼에도 로하니의 발언이 갖는 정치적 의미는 작지 않다. 그가 던진 질문은 결국 이란 지도부가 국민에게 “앞으로도 수년, 혹은 20년 동안 미국과 싸우겠느냐”고 물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현재 이란은 강경파를 중심으로 여전히 미국에 맞서겠다는 강경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9월 들어 이란은 호르무즈 해협에 새로운 제한구역을 설정하겠다고 경고했고, 미국의 공격에 대해서는 더욱 강력하게 보복하겠다는 입장도 거듭 밝혔다.

미국 역시 군사적 압박을 포기하지 않고 있지만, 그것만으로 이란을 굴복시키기 어렵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미국은 이란의 항복을 받아내지 못한 채 경제 제재와 해상 봉쇄에 의존하고 있다. 로이터가 최근 평가했듯 이란은 상당한 군사적 손실을 입었지만 여전히 미국과 역내 국가들을 위협할 능력을 유지하고 있다. 전쟁은 명확한 승자 없이 교착된 상태다.

미국이 이란을 굴복시키지 못하고, 이란 역시 미국을 몰아내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될수록 양국 모두에 필요한 것은 ‘승리의 선언’보다 출구전략일 수 있다. 로하니가 꺼내든 ‘국민에게 묻자’는 제안은 이란 내부의 논쟁이 공개적인 정치 의제로 올라오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신호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규화 대기자 david@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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