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웅 ETRI(한국전자통신연구원) 원장

지난주 ‘ETRI Conference 2026’을 마쳤다. 인공지능(AI)이 우리 사회를 혁신하는 시대에 ETRI의 연구진들이 AI·DX(디지털전환)을 중심으로 국가전략기술을 선도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모습을 국민과 산·학·연 전문가들에게 보여드리는 자리였다. 행사를 마치고 돌아보니 마음에 가장 오래 남은 것은 화려한 기술의 미래나 숫자가 아니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기술을 연구하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이었다.

지금 세계는 AI가 촉발한 거대한 변화의 한복판에 서 있다. AI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단계를 넘어 스스로 추론하고 판단하며, 로봇이라는 몸을 입고 현실 세계로 나오고 있다. AI와 인간을 구별하기 어려워지고 인간의 지적 능력을 넘어서는 이른바 ‘특이점’(Singularity)이 더 이상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기술이 빠르게 발전할수록 우리는 오히려 기술의 목적을 물어야 한다. 기술은 사람을 대신하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더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반복적인 일에서 벗어나 창의적인 일에 몰입하게 하고, 장애와 질병의 한계를 극복하게 하며, 교육과 의료의 격차를 줄이고, 누구도 기술 발전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만들어야 할 기술의 미래라고 생각한다.

ETRI가 새로운 비전으로 ‘AI·DX 혁신으로 이끄는 함께 사는 따뜻한 세상’을 제시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기술과 사람이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하나가 되어 사람의 삶을 더욱 이롭게 하는 ‘인기일체’(人技一體)의 세상을 만들자는 뜻이다.

이를 위해 ETRI부터 달라져야 한다. 먼저 잘할 수 있는 분야에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모든 것을 잘하려 하기보다 국가가 필요로 하고 ETRI가 잘할 수 있는 분야에서 세계 최고를 지향해야 한다. AI, 피지컬 AI, 입체통신, 공간미디어, ADX 융합 등 미래 국가 경쟁력을 좌우할 핵심 분야를 중심으로 연구역량을 결집하고, 단기적 성과보다는 중장기 국가적 임무와 목표를 향한 임무형 연구를 강화할 것이다.

연구의 방식도 바뀌어야 한다. 이제 한 기관이 모든 기술을 독자적으로 완성하는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AI처럼 기술의 융합과 발전 속도가 빠른 분야일수록 대학과 기업, 타 출연연구원, 해외 연구기관과 경계 없는 협력이 중요하다. 연구기관 간 서로의 강점을 연결하고, 공동의 목표를 향해 ‘개방형 R&D 플랫폼’으로 ETRI를 변화시키고자 한다.

연구자가 마음껏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연구기관의 경쟁력은 결국 사람에게서 나온다. 젊은 연구자에게 과감하게 기회를 주고, 분야와 조직의 경계를 넘나드는 ‘경계없는 플레이어’(Borderless Player)가 자유롭게 도전하도록 해야 한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세계 최초와 최고에 도전하는 연구 본능이 살아 있는 연구원을 만들고 싶다.

성과를 바라보는 기준도 달라져야 한다. 논문과 특허의 숫자만으로 연구의 가치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 하나의 연구성과라도 산업을 바꾸고, 새로운 시장을 만들고, 국가의 기술주권을 지키며, 국민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ETRI는 지난 반세기 동안 대한민국이 ICT 강국으로 성장하는 길을 열어왔다. 이제 새로운 50년을 시작하는 ETRI 앞에는 AI 대전환이라는 또 하나의 거대한 도전이 놓여 있다. 이번 컨퍼런스는 완성된 미래를 보여주는 자리가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가 앞으로 만들어가야 할 미래에 대한 약속에 가까웠다. 그 미래는 기술만 앞서가는 세상이 아니라 기술의 발전이 사람의 행복과 국가의 성장으로 이어지는 세상이어야 한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마지막에 남아야 할 질문은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기술이 사람을 더 사람답게 하는가?”

ETRI의 연구가 이 질문에 답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AI와 디지털 기술의 혁신을 통해 대한민국의 새로운 성장동력을 만들고, 그 성과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에 따뜻하게 스며드는 것. 이것이 ETRI가 꿈꾸는 미래이다. 우리가 다시 힘차게 시작해야 할 새로운 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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