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현철 논설실장

'블랙 팬덤'(Black Phantom·Fantasma negro, 검은 유령)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추상 미술을 개척한 거장 빌리 바우마이스터(Willi Baumeister, 1889~1955)가 말년인 1952년에 발표한 걸작이다.

빌리 바우마이스터 (Willi Baumeister), '블랙 팬텀 (Black Phantom·Fantasma negro). 1952년. 판지에 합성수지와 모래를 섞은 기름. 세로 81 x 가로 100cm. 스페인 마드리드 티센 보르네미사 국립 미술관(Museo Nacional Thyssen-Bornemisza) 소장.
빌리 바우마이스터 (Willi Baumeister), '블랙 팬텀 (Black Phantom·Fantasma negro). 1952년. 판지에 합성수지와 모래를 섞은 기름. 세로 81 x 가로 100cm. 스페인 마드리드 티센 보르네미사 국립 미술관(Museo Nacional Thyssen-Bornemisza) 소장.

화면 중앙에 중력을 거스르는 듯한 비정형의 거대한 검은색 생명체(유령)가 이리저리 얽힌 채 둥둥 떠 있는 형상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검은 유령의 덩어리에서 곤충의 더듬이나 다리, 혹은 작은 눈구멍 같은 미세한 흔적들이 발견된다. 묵직하고 어두운 검은색 중심부의 가장자리를 따라 빨강, 노랑, 파랑, 초록 등 선명하고 밝은 원색 파편들이 찢어진 종이처럼 불규칙하게 배치돼 극적인 대비를 이룬다.

바우마이스터는 공간에 떠 있는 유령처럼 생체 형태를 띤, 무게감이 없는 검은 덩어리로 이뤄진 추상적인 구성을 통해 '비어 있음'과 '공허', '무'(無)의 개념을 시각화하고자 했다. 또한 종이를 찢어 붙인 콜라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모래와 합성수지 등을 물감에 섞어 정교하게 캔버스 위에 '그려낸' 가짜 콜라주(False Collage) 기법을 사용해 독특하고 거친 질감을 표현했다. 검은 유령은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우주 혹은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서 스스로 생성되고 변화하는 '알 수 없는 원초적인 창조적 힘'(Metamorphosis of the Unknown)을 상징한다. 이 걸작은 스페인 마드리드에 있는 티센 보르네미사 국립미술관(Museo Nacional Thyssen-Bornemisza)이 소장하고 있다.

나치의 탄압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전후 독일 현대 미술의 재출발을 이끈 교육자이자 이론가이기도 한 바우마이스터의 화풍은 크게 초기 기하학적·스포츠 연작, 중기 나치 탄압기 원시·생명 연작, 전후 말년의 몬타루(Montaru) 연작으로 나뉜다. 초기 구성주의에서 출발해 원시적인 것을 드러내고자 하는 추상으로 발전해 나갔다.

초기(1920~1930년대 초)는 기계 문명의 발전과 도시 노동자의 역동성을 기하학적인 추상 형태로 표현한 시기다. 예술은 상아탑에서 벗어나 사회를 재건하는 실용적인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구성주의(Constructivism)와, 피터 몬드리안이 창시한 네오플라스티시즘(Neoplasticism·신조형주의)의 영향을 받아 날카로운 모서리, 평면, 기하학적 형태를 강조했다.

디자인 학교인 바우하우스의 교수를 지낸 오스카 슐레머 등과 협업하며 건축과 회화를 결합한 '벽화 연작'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물속으로 뛰어드는 다이버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유기적인 곡선과 사각형, 원 등의 기하학적 도형으로 분할해 표현한 '다이버'(Diver, 1920년대), 스포츠의 리듬감과 신체 동작을 단순화된 선과 면으로 재구성한 '노란색 위의 테니스 선수'(Tennis Player on Yellow, 1933) 등의 작품이 해당한다.

중기(1930년대 중반~1940년대)는 나치에 의해 '퇴폐 미술가'로 찍혀 숨어 지내던 탄압기 작품들이다. 그리스어로 '형태' 또는 '본질'을 뜻하는 '에이도스(Eidos) 연작'(1938~1939년)은 세포나 아메바를 연상시키는 유기적인 생명체의 원초적 형태를 캔버스에 담았다. 또한 모래, 식물성 수지 등을 물감에 섞어 거친 질감을 만들고, 그 위에 원시 부족의 가면이나 주술적 도상을 닮은 기호를 그린 '아프리카(Africa) 연작'(1942~1945)도 그렸다.

이는 현대 미술의 두 가지 대립되는 흐름, 즉 세잔과 큐비즘에서 비롯된 이성적이고 지적인 흐름과, 원시적이고 영원한 신화로의 회귀를 추구하는 환상과 감정의 흐름을 융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우마이스터, '아프리카의 이야기'(Afrikanische Erzahlung · African Tale). 1942년. 카드보드 위 레진과 퍼티 오일. 세로 35.5 × 가로 45.5 cm. 독일 슈투트가르트 국립미술관 소장.
바우마이스터, '아프리카의 이야기'(Afrikanische Erzahlung · African Tale). 1942년. 카드보드 위 레진과 퍼티 오일. 세로 35.5 × 가로 45.5 cm. 독일 슈투트가르트 국립미술관 소장.

'아프리카의 이야기'(Afrikanische Erzahlung · African Tale)는 바우마이스터가 나치 정권의 탄압을 받던 1942년에 제작한 '아프리카(Africa pictures) 연작' 중 대표작이다. 당시 그는 슈투트가르트 근처의 군 페인트 공장에서 위장용 도료를 연구하는 일을 하며 비밀리에 이 작품을 그렸다.

아프리카 원시 미술과 조각을 수집하던 컬렉터이기도 한 바우마이스터는 아프리카의 예술에서 인류의 가장 깊고 원초적인 뿌리, 그리고 문명의 때가 타지 않은 순수한 생명력을 발견했다. 작품에는 구체적인 사람이나 동물이 아니라, 마치 고대 동굴 벽화나 상형문자를 연상시키는 어둡고 유기적인 암호화된 기호(Hieroglyph)들이 가득 차 있다. 그는 캔버스 위에 퍼티(putty·진흙과 유사한 재료)나 모래를 섞어 두껍게 바른 뒤 그 위에 유성 파스텔과 잉크로 작업했다. 이 때문에 그림의 표면이 마치 거친 아프리카의 대지나 오래된 동굴 벽면 같은 독특한 물질감을 풍긴다. 바우마이스터는 세련되고 정교한 독일 전통 사실주의 미술만을 강요한 나치에 맞서 인류 공통의 원시적이고 보편적인 예술의 기원을 추상화함으로써, 나치의 협소한 민족주의와 전체주의에 시각적으로 저항했다.

전쟁이 끝난 후, 우주의 생성과 역동적인 에너지를 추상화한 '몬타루 & 몬투리 연작'(1950~1955년)은 예술적 정점이자 최고의 걸작들로 꼽힌다. 두 연작은 바우마이스터가 스스로 창조해낸 가상의 언어를 제목으로 삼았으며, 우주의 생성 원리와 내면의 에너지를 '검은색 에너지 필드'와 '흰색 에너지 필드'의 대조를 통해 탐구한 쌍둥이 같은 연작이다.

바우마이스터 '몬투리 - 원' ( Monturi -Kreis). 1954년. 목질 섬유판위에 합성 레진과 모래에 오일.  세로 54 x 가로 46 cm. 개인 소장.
바우마이스터 '몬투리 - 원' ( Monturi -Kreis). 1954년. 목질 섬유판위에 합성 레진과 모래에 오일. 세로 54 x 가로 46 cm. 개인 소장.

'몬타루 (Montaru) 연작'은 바우마이스터가 창작한 가상의 언어로, 화면 중앙에 거대하고 묵직한 검은색 비정형 덩어리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어두운 중심을 둘러싸고 화려하고 밝은 색채 파편들이 강렬하게 뿜어져 나오며 우주의 탄생이나 내면의 폭발을 연상시킨다. '몬투리 (Monturi) 연작'은 '몬타루'와 쌍을 이루는 연작으로, 검은 형태가 중심을 지배하는 대신 색채와 선들이 한층 더 가볍고 쾌활하게 부유하며 팽창하는 우주의 역동성을 보여준다.

바우마이스터는 두 연작을 통해 우주의 낮과 밤, 파괴와 생성, 흡수와 방출이라는 '이중적 힘의 균형'을 시각화하고자 했다. 나치의 탄압으로 오랜 어둠을 겪었던 그가 말년에 도달한 초월적이고 평온한 우주관의 정수다.

1889년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태어난 바우마이스터는 1905년부터 1907년까지 고향에서 장식화가 견습 과정을 마친 후 군 복무를 했다. 견습 기간 동안 슈투트가르트 미술 아카데미에서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1911년 처음으로 파리를 방문했고 1912년 취리히 갤러리 전시회에 성공적으로 참가했으며, 이듬해 베를린의 데어 슈투름 갤러리에서 열린 제1회 독일 가을 살롱에 참가했다. 그곳에서 그는 표현주의 화가 프란츠 마르크를 만났다.

1919년 슈투트가르트에서 슐레머를 비롯한 예술가들과 함께 예술가 그룹 '위에흐트(Uecht, 진정한, 참된) '를 창립했으나 1921년에 탈퇴했다. 1922년 베를린의 데어 슈투름(Der Sturm) 갤러리에서 피카소 등과 함께 입체주의를 이끈 프랑스 페르낭 레제와 함께 개최한 공동 전시회를 통해 이름이 알려졌다. 이 시기에 바우마이스터는 파울 클레, 르 코르뷔지에, 아메데 오젠팡, 미셸 세우포르 등과 같은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관계를 쌓았다 .

1926년 화가 마르가레테 외엠과 결혼했고, 이듬해 파리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또한 베를린 대미술전에도 개인 전시실을 마련하여 참가했고, 그곳에서 러시아의 절대주의 화가 카지미르 말레비치를 만났다.

프랑크푸르트 슈테델 미술학교 교수 등으로 재직하며 순탄한 커리어를 이어가던 중 1933년 나치 정권이 들어서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나치는 그의 작품을 '퇴폐 미술'(Entartete Kunst)로 낙인찍어 몰수했고, 교수직 박탈은 물론 일체의 전시와 창작 활동을 금지했다. 바우마이스터는 해외로 망명하는 대신 독일 남부 지방에 숨어 지내는 '내적 망명'을 택했다. 그는 감시를 피해 수백 점의 드로잉을 비밀리에 그렸고, 전후 현대 미술의 이론적 기초가 되는 명저 '예술 안의 미지의 것'(Das Unbekannte in der Kunst)을 집필하며 어둠의 시기를 버텨냈다.

1945년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슈투트가르트 미술학교 교수로 복귀해 파괴된 독일 전위 예술계를 재건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또 동시대 다른 독일 작가들과 달리 일찍부터 미국, 프랑스, 스페인 등 세계를 무대로 활발히 교류하며 독일 현대 미술의 위상을 국제적으로 끌어올렸다.

전후인 1950년대 서독 미술계는 나치가 금지했던 전위 예술을 되살리기 위해 추상 미술가들이 결성한 '젠 49(ZEN 49)' 그룹과 앵포르메르(Informel) 운동이 주류를 이뤘다. 바우마이스터는 에른스트 빌헬름 나이(Ernst Wilhelm Nay, 1902~1968), 절친인 프리츠 빈터(Fritz Winter, 1905~1976), 루프레히트 가이거(Rupprecht Geiger, 1908~2009) 등과 함께 나치가 파괴했던 인간의 정서와 표현의 자유를 예술로 치료하고 복원하는 운동을 펼쳤다.

바우마이스터는 말년에 육체적인 노쇠함 속에서도 매일 이젤 앞에 앉아 지치지 않는 실험 정신을 보여주었다. '몬타루', '몬투리' 연작 외 모래를 섞어 고대 암각화의 질감을 재현한 '자퍼(Safer) 연작', 쾌활한 빛을 담은 '블룩사오'(Bluxao) 등을 캔버스에 쏟아냈다. 또한 판화(실크 스크린, 석판화)와 연극 무대 디자인까지 영역을 넓혔다.

바우마이스터는 1955년 8월 슈투트가르트에 있는 자신의 작업실에서 작품을 그리던 중, 이젤 앞에 앉아 붓을 쥔채로 향년 66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숨을 거둔다. 마지막 순간까지 붓을 놓지 않았던 그의 유해는 슈투트가르트의 프라크프리드호프(Pragfriedhof) 공동묘지에 묻혔다.

바우마이스터는 예술가의 주된 임무는 미지의 영역에 존재했던 것을 가시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술은 미지의 것을 통해 인간에게 세상을 드러내는 데 있다. 예술의 핵심 가치는 설명할 수 없는 것, 이해할 수 없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그에게 불멸의 과정 형태를 띤 예술의 포괄적인 힘은 변형, 즉 미지의 세계의 개화에 있었다.

강현철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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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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