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아 도시 스토리 텔러
길을 걸으면서 길을 보지 않는 사람들
빨라진 도시에서 잃어버린 일상 풍경
속도를 늦추면 비로소 눈에 보이는 것
평범한 작은 발견이 우리 삶을 채운다
지난주 점심을 하러 가는 길이었다. 일정이 빠듯해 식당까지 벌처럼 날아가 밥을 먹고, 나오면서는 덥구나 하고 돌아왔다. 자리로 돌아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방금 지나온 길에 무엇이 있었지?
노점이 있었는지, 오래된 나무는 있었는지, 그늘 아래 벤치는 있었는지 도통 기억이 나질 않았다. 분명 그 길을 서너 번 걸었는데도 그렇다. 목적지만 생각해서다. 그럴 때마다 같은 다짐을 한다. 다음에, 여유가 생기면, 천천히 걸어야지. 그렇지만 막상 한가한 오후가 와도 잘 보지를 못하고, 보아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근대 이후 도시의 중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는 이동시간을 줄이는 것이었다. 도로를 넓히고 철도를 놓고 더 좋은 이동수단을 개발했다. ‘더 많이, 더 빨리’가 도시 경쟁력의 지표가 되었다. 디지털 기술까지 그 일을 돕는다. 내비게이션은 최단 경로를 계산하고, 지도 애플리케이션은 가장 빠른 환승 방법을 알려준다. 그 결과 우리는 이전 어느 시대보다 정확하고 빠르게 목적지에 도착한다. 편리하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길의 의미가 달라졌다는 데 있다. 길은 본래 이동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만나고 장사를 하고 아이들이 놀고 소식을 주고받던 생활의 장소였다. 골목 어귀의 평상과 가게 앞 의자, 나무 아래 그늘 같은 곳에서는 특별한 목적 없이도 사람들이 머물렀다. 그러나 자동차 중심의 도시가 확대되면서 길은 점차 ‘통과를 위한 공간’이 되었고, 배달과 온라인이 더해지면서 이제는 그 길 자체에서 머무는 일은 더 줄어들고 있다. 밥집을 찾으러 동네를 돌아다닐 일도, 산책할 일도, 이웃과 인사를 나누고 계절의 변화를 실감하는 일도 드물어진다. 쇼핑하러 길을 걸어도 크게 다를 바가 없다.
효율은 생산성 극대화를 위한 수단이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효율이 목적이 되었다. 시간을 아끼고, 아낀 시간에 또 시간을 아껴 무언가를 한다. 길을 걸으면서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느라 고개는 땅을 향해 있고, 심지어 건널목에서도 그런 광경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하루는 목적지와 목적지의 연속이 되고, 그 사이의 시간은 가능한 한 줄여야 할 비용이나 자원처럼 취급된다. 시간을 벌었을지는 모르지만, 목적지를 가는 과정을 잃어가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 다음이다. 과정을 잃어버린, 또는 자발적으로 과정을 생략한 우리들은 이제는 과정을 사서 본다. 누군가 포착한 골목의 고양이, 창가에 걸린 노을, 김이 오르는 국숫집의 한순간이 SNS에서 수만 번 공유되고, 그것은 또 다른 비즈니스가 된다. 사진 한 장으로 유명해진 메타세쿼이아 길과 골목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가 같은 각도에서 사진을 찍는다. 그곳에 특별한 무엇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본래 누군가의 일상이었다. 일상에서 그런 순간을 보지 못하니, 남이 발견한 순간을 목적지 삼아 누리러 가는 것이다. 과정 중 지극히 작은 한순간이 근사하게 포장되고, 목적지로 탈바꿈한다.
얼마 전 어시장에 갔을 때다. 생선 좌판 뒤로 헌 집과 좁은 골목길들이 구불구불 있는 오래된 시장이었다. 골목을 따라 걷다 보니, 생선을 팔고 난 빈 나무 궤짝을 층층이 쌓아놓은 틈 사이로 길고양이 한 마리가 보였다. 훔친 것인지 아니면 마음씨 좋은 생선장수가 준 것인지는 몰라도 생선 한 마리를 야무지게 뜯어먹고 있었다. 경계하는 눈빛으로 궤짝 옆에 바짝 붙어 생선을 뜯는 고양이 모습이라니,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라 한참을 서서 보았다. 생선을 사야겠다는 목적만 있었다면 그 골목에 들어설 일도, 그 장면을 눈에 담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순간은 어디에서 파는 것이 아니다. 다만, 보려 할 때 비로소 보이는 것이다.
걸음을 늦춘다고 보는 것이 저절로 되는 것도 아니다. 미국 작가 애니 딜러드는 개안수술로 처음 시력을 얻은 환자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포도 한 송이를 처음 본 소년은 짙푸르고 빛이 나며, 매끄럽지 않고 울퉁불퉁하고 움푹 들어갔다고 말했다. 과수원을 찾은 어린 소녀는 나무 앞에서 말을 잃고 서 있다가, 가지를 손에 쥐고서야 간신히 이름을 말할 수 있었다. 소녀는 그 나무를 ‘빛이 깃든 나무’라고 불렀다. 사물의 이름을 배우기 전의 눈은 세상을 그렇게 보았다.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문화와 관념이라는 렌즈를 통해 본다는 말이기도 하다. 거꾸로 말하면, 관념을 잠시 내려놓고 천천히, 자세히, 시간을 들여 바라볼 때에야 비로소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한다는 말이다. 보는 것도 배워야 하는 일인 셈이다.
요즘 극장에서 다시 만나는 오디세우스도 그랬다. 그는 10년 만에 이타카에 돌아왔지만, 목적지인 성으로 곧장 달려가지 않았다. 낯선 사람처럼 천천히,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며 걸었고, 그 과정에서 주군을 기다리며 죽어가는 자신의 늙은 사냥개 아르고스를 만난다.
도시는 우리가 도착하는 장소들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집과 직장 사이, 역과 식당 사이, 주차장과 건물 사이, 그리고 이름조차 붙지 않은 수많은 공간이 도시 대부분을 이룬다. 그곳을 얼마나 빨리 통과할 수 있는가만큼, 그곳에서 무엇을 보고 어떻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가, 무엇을 느낄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걷다가 쉴 만한 그늘과 앉을 자리를 만드는 일은 행정의 몫이다. 그러나 그 길 위에서 아무 선입견 없이 서두르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는 일은 각자의 몫이다. 거창한 일은 아니다. 밥을 먹으러 가는 길에 한 번 멈추는 일. 돌아오는 길을 다른 골목으로 걷는 일. 하늘을 올려다보는 시간을 조금씩 늘리는 일. 그 정도의 아주 작은 일이다. 그렇지만 쉽지는 않다.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한 도시를 만들어왔다. 이제는 목적지와 목적지 사이에도 삶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그토록 원해 돈을 내고서라도 누리려는 삶의 한 장면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해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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