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환 KAIST 경영공학부 교수

시대를 선도하는 탁월한 상상력과 화려한 연출이 멋들어지게 가미된 ‘오디세이’ 같은 대작 영화를 스크린으로 마주하는 것은 벅찬 경험이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이러한 서사적 대작이 개봉한 전후로는 어김없이 원전이나 관련 번역서, 각본집 등이 불티나게 팔려나간다. 완성된 영상을 수동적으로 소비하는 것을 넘어, 그 거대한 서사가 활자로는 과연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 궁금증을 느끼기 때문이다. 고요한 텍스트를 읽어 내려가며 각자의 머릿속에서 나름의 영화를 주도적으로 제작해보는 기쁨은, 다름 아닌 인간으로서 살아 숨 쉬며 사유하고 있음을 강렬하게 느끼게 해준다.

2023년 말경부터 MZ세대를 중심으로 ‘텍스트 힙’이라는 낯선 조어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글자를 의미하는 ‘텍스트(Text)’와 멋지고 개성 있다는 뜻의 은어 ‘힙(Hip)하다’가 결합된 이 말은, 책을 읽거나 필사하는 행위 자체를 가장 세련된 문화로 여기는 현상을 일컫는다. 스마트폰만 열면 화려한 색감과 역동적인 사운드로 무장한 숏폼 콘텐츠가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시대다. 이미지나 동영상에 비하면 시청각적인 자극 효과가 훨씬 떨어지는 흑백의 조용한 활자에 왜 젊은 층이 새삼스럽게 매력을 느끼게 된 것일까.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날 선 비판을 가하기도 한다. 실제로 책 속의 지식과 사유에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이른바 ‘북카페 중독’처럼 감각적인 공간에 앉아 책을 읽는 자신의 모습을 SNS에 전시하기 위한 지적 허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2024년 10월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책과 독서에 대한 관심을 급속히 달군 점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책을 가까이해 본 사람이라면 꾸준한 독서가 얼마나 고도의 집중력과 인내를 요구하는 지난한 행위인지 잘 안다. 만약 오로지 과시와 허영만이 목적이었다면, 이 세상에는 굳이 골치 아픈 책을 펼치지 않고도 지위를 뽐낼 수 있는 훨씬 쉽고 자극적인 대안이 얼마든지 있다.

그럼에도 청년들이 기꺼이 텍스트에 시간을 내어주는 데에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유튜브 등에서 수시로 접하는 화려한 영상이나 거침없는 달변은 분명 강렬한 효용과 포만감을 선사한다. 하지만 그 감각적 자극이 끝난 뒤 남는 지적 갈증은 오직 활자만이 채울 수 있다. 정제된 단어와 논리적인 문장을 사용하고, 그 출처를 성실하고 명확하게 제공하는 전문 서적이나 신문 기사만큼 묵직한 신뢰감을 주는 매체는 여전히 흔치 않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젊은 세대 역시 진짜 믿을 수 있는 기준점으로서 텍스트의 가치를 직관적으로 깨닫고 있는 것이다.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일목요연하게 말로 전하기 어렵고, 말로 내뱉은 것을 글로 옮기려면 더더욱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텍스트 정보, 특히 논문이나 서적으로 완성된 문헌은 상대적으로 ‘함부로’ 생산되거나 쉽게 대체하기 어렵고 그에 따른 신뢰성을 내재하고 있다.

경영학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필자의 직업적 습성 때문인지는 몰라도, 대중이 트렌드에 관심을 갖는 가장 기저의 동기 중 하나는 결국 ‘어떻게 그러한 흐름을 이용해 비즈니스 기회를 찾고 부가가치를 창출할 것인가’에 닿아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실제로 ‘텍스트 힙’ 트렌드는 출판업계는 물론 IT, 금융, 패션 회사들의 마케팅 공식을 바꾸고, 서점과 동호회의 질적 진화를 이끌어내며 새로운 자본의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다.

하지만 이 현상의 본질과 지속가능성을 단지 상업적 가치로만 판단할 수는 없다. 부지불식간에 내 몸의 일부가 된 것 같기도 한 스마트폰의 숏폼이나 릴스에 탐닉하여 찰나의 자극에 매몰되고 도파민 중독에 빠지기 쉬운 현대 사회에서 싹튼 ‘텍스트 힙’의 이면에는 인류의 사고를 확장하고 문명을 진화시키는 데 혁혁한 지렛대 역할을 해온 ‘문자의 힘’에 대한 향수와 귀향 욕구가 짙게 깔려 있는 것 아닌가 싶다.

우리는 지금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적 노동을 통째로 뒤흔드는 기술적 변곡점에 서 있다. 그러나 세상을 놀라게 한 첨단 AI 언어모델들이 추론하고 작동하는 방식 역시 결국 방대한 ‘텍스트’ 데이터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인공지능이든 인간지능이든, 가장 고차원적인 지적 활동 메커니즘의 근본은 결국 텍스트를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텍스트를 잃는 것은 곧 사유의 근원적인 힘을 잃는 것과 같다. 청년들이 다시 활자를 힙하게 여기며 기꺼이 책장을 넘기는, 나름 신선한 문화가 무척이나 반갑고 고마운 이유다.



[저작권자 ⓒ디지털타임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1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