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축제 방문해 인간의 기술 통제 재차 강조
지난 5월 첫 회칙서도 AI의 지배·독점에 경고
“빈곤·불평등·전쟁 낳는 권력 구조 드러내야”
‘인간의 모습 한 기술’… AI 혜택 모두 누려야
레오 14세 교황
인공지능(AI)이 인류의 삶을 빠르게 바꾸고 있는 가운데 레오 14세 교황이 거듭 AI와 첨단기술의 무분별한 발전에 강력한 경고음을 냈다.
기술이 인간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인간을 지배하거나 배제하고 전쟁과 불평등을 확대하는 수단으로 변질될 경우 과감히 통제해야 한다는 메시지다.
레오 14세는 22일(현지시간) 산마리노 공화국과 이탈리아 동부 도시 리미니를 방문해 평화와 공동선에 관한 메시지를 잇달아 내놓았다.
리미니에서 열린 가톨릭 문화축제에서는 “빈곤과 불평등, 전쟁, 환경 재앙의 근원에 있는 부당한 권력 구조를 드러내자”고 하면서 “이윤에 대한 우상숭배에서 노동을 해방하고 기술 발전이 파괴적인 것이 될 때마다 무장해제하자”고 역설했다. 리미니 방문은 ‘민중 간 우정을 위한 만남’ 행사 참석을 위한 것으로, 교황청에 따르면 레오 14세는 이날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과 만나고 평화와 연대의 메시지를 전했다.
교황의 이날 발언은 지난 5월 발표한 첫 회칙 ‘마니피카 후마니타스’(Magnifica Humanitas·고귀한 인류)의 연장선에 있다. 이 회칙은 ‘AI 시대 인간 보호에 관하여’를 부제로, AI가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훼손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내용을 핵심으로 담고 있다.
교황은 회칙 발표 당시 “인공지능은 무장해제돼야 한다”고 선언하면서 이 표현이 강하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관심을 끌고 양심을 일깨우며 인류가 나아갈 길을 제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선택했다”고 설명했다.
여기서 ‘무장해제’는 AI 자체를 폐기하거나 기술 발전을 중단하자는 의미가 아니다. 교황이 문제 삼은 것은 AI가 지배와 배제, 전쟁과 죽음의 논리에 편입되는 상황이다.
회칙은 AI가 의료·고용·안보 등 인간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서 편향된 데이터를 통해 새로운 차별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지적한다. 또 AI 기술과 데이터가 소수 기업과 권력집단에 집중될 경우 경제적·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특히 레오 14세가 이 문제를 자신의 첫 회칙으로 다뤘다는 점은 의미가 작지 않다. 회칙은 교황이 교회와 세계를 향해 제시하는 최고 수준의 가르침 가운데 하나다. 이번 회칙은 1891년 레오 13세가 산업혁명으로 발생한 노동 문제를 다룬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 반포 135주년에 맞춰 발표됐다. 산업혁명이 인간의 노동과 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던 시대에 레오 13세가 노동과 사회정의 문제를 제기했다면, 레오 14세는 AI라는 새로운 기술혁명이 인간의 존엄과 노동, 자유를 어떻게 바꿀 것인지 묻고 있는 셈이다.
교황이 회칙에서 강조하는 핵심은 기술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기술의 인간화’다. AI와 자동화가 인간을 위험하고 반복적인 노동에서 해방한다면, 그로 인해 생긴 시간과 생산성은 인간의 창의성, 가족과 이웃에 대한 돌봄, 교육과 문화, 공동체 활동을 풍요롭게 하는 데 쓰여야 한다는 것이다.
AI 발전의 결과가 소수의 기업과 투자자에게만 집중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이 인간다운 삶을 누리는 데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도 한다. 회칙은 기술 발전이 정해진 운명이 아니라 인간의 선택에 따라 공동선을 향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레오 14세의 AI 경고가 특히 주목받는 이유는 AI를 주도하는 국가가 아무래도 미국이고, 그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불편한 관계를 형성했던 데서도 기인한다. 미국 출신 최초의 교황이면서도 그는 이란전쟁과 이민자 추방정책 등을 둘러싸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워왔다.
그런 상황에서도 JD 밴스 부통령은 레오 14세의 AI에 대한 문제의식에 긍정적인 평가를 내놓았다. 밴스 부통령은 지난 5월 NBC뉴스 인터뷰에서 회칙이 “매우 심오하게 들렸다”며 교회 지도자에게 기대할 만한 메시지라고 평가했다. 그는 레오 13세가 산업혁명 시대의 거대한 기술변화를 다뤘던 것처럼 레오 14세가 AI 시대의 출발점에서 도덕적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레오 14세가 22일 다시 “기술 발전이 파괴적인 것이 될 때마다 무장해제하자”고 강조한 것도 이 같은 인류의 공통된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교황이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은 기술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기술을 통제하고, 누구를 위해 사용하는가’라는 질문이다.
물론 교황의 표현이 AI에 대해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지도록 만들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윤에 대한 우상숭배에서 노동을 해방하자”는 표현은 자칫 이윤 추구를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 자체를 부정하고 사회주의적 노동 해방을 주장하는 것으로 오해될 소지가 없지 않다. 또 기술 발전이 파괴적일 경우 ‘무장해제’해야 한다는 표현 역시 전제조건을 달았다고 하더라도 기술혁신 자체에 대한 거부로 오해받을 수 있다.
그럼에도 레오 14세가 던지는 질문은 AI 시대에 결코 가볍지 않다. AI를 두려워해 기술 발전을 멈추자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기술의 주인이 되자는 요구이기 때문이다.
AI가 만들어낼 막대한 생산성과 풍요가 소수에게 집중돼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대신 인간 모두의 여가와 창의성, 교육과 돌봄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쓰이도록 하는 것은 정부와 기업, 국제사회가 함께 풀어야 할 과제다. AI 시대의 진정한 의미는 기계가 더 많은 일을 할수록 인간이 얼마나 더 인간답게 살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이규화 대기자 david@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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