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진 ETRI 미디어시스템연구본부장

이태진 ETRI 미디어시스템연구본부장
이태진 ETRI 미디어시스템연구본부장

평면 화면 속 영상을 손끝으로 넘겨보던 시대가 가고, 공간 자체를 디지털 데이터로 구현하고, 그 안을 자유롭게 이동하며 경험하는 ‘입체공간 미디어’(Spatial Media) 시대가 열리고 있다. 활자에서 라디오와 텔레비전으로, 그리고 인터넷과 스마트폰으로 이어진 미디어 기술의 진화는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뿐 아니라, 산업과 경제, 문화, 그리고 우리의 일상을 바꾸어 왔다. 이제 우리는 미디어 기술이 화면을 넘어 입체공간으로 확장되는 새로운 전환점 앞에 서 있다.

입체공간 미디어는 현실 공간을 디지털로 정밀하게 재현하고, 사용자가 원하는 위치와 시점에서 현실과 가상을 자유롭게 경험할 수 있는 차세대 미디어 기술이다. 예를 들어 기존 축구 중계에서는 편집자가 보내주는 영상만 시청해야 했지만, 입체공간 미디어 시대에는 축구장 공간 안으로 들어가 선수, 심판, 감독 등의 시점에서 자유롭게 경기를 관람할 수 있게 된다. 사용자는 더 이상 정해진 화면 안에 머무는 수동적 시청자가 아니라, 입체공간 속을 스스로 탐험하고 상호작용하는 능동적 참여자가 된다.

이러한 변화는 콘텐츠 산업의 경계를 넘어 문화, 교육, 국방, 로보틱스 등 다양한 산업 전반의 혁신을 이끌 것으로 기대된다.

우리나라는 세계 최고 수준의 ICT 인프라와 디지털 기술력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글로벌 빅테크들이 공간 컴퓨팅과 생성형 AI 시대의 주도권을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는 지금, 개별 기업이나 기관의 파편화된 기술력만으로는 이 흐름을 이끌어 갈 수 없다. 입체공간 미디어 시대를 선도하기 위해서는 공간 데이터 획득과 생성에서부터, 압축·전송, 디스플레이와 재현, 그리고 AI 기반 서비스 플랫폼까지 전 주기 기술이 하나의 생태계 안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따라서 원천기술 개발부터 실증, 산업화, 그리고 국제 표준화에 이르기까지 산·학·연이 기술과 데이터를 공유하며 함께 혁신을 만들어가는 개방형 협력체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국가 차원의 입체공간 미디어 통합 플랫폼 구축과 연구 인프라 조성이 시급하다. 이 플랫폼은 특정 기관만을 위한 폐쇄적 인프라가 되어서는 안 된다. 국내외 기업과 대학, 연구기관이 한데 모여 핵심 기술을 함께 개발하고 검증하며 글로벌 표준을 주도하고, 연구실의 성과를 시장(Market)으로 연결하는 국가 차원의 개방형 혁신 허브 역할을 해야 한다.

기술의 역사를 돌아보면 인터넷 시대를 이끈 것은 개방형 네트워크였고, 모바일 시대를 성장시킨 것은 플랫폼 생태계였다. 세상을 바꾼 것은 독보적인 기술이 아니라, 수많은 기업과 연구자가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었던 개방형 생태계였다. 입체공간 미디어도 다르지 않다. 개방형 플랫폼을 중심으로 다양한 기술과 서비스가 하나로 연결될 때 비로소 새로운 시장이 형성되고 혁신은 더욱 빠르게 확산될 수 있다.

ETRI는 이러한 연결의 중심에서 대한민국 산·학·연이 함께 성장하는 입체공간 미디어 연구개발 생태계를 만들어가고자 한다. 개방과 협력을 바탕으로 국내 기술이 세계 시장으로 확산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 연구실의 성과가 산업 현장으로 이어지도록 앞장설 것이다. 이는 특정 기관의 성과를 넘어 대한민국 미디어 기술의 미래 경쟁력을 높이는 길이다.

평면에서 입체로, 그리고 입체공간으로 이어지는 미디어 기술의 진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이제 중요한 것은 그 거대한 변화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먼저 미래 생태계를 설계하고 만들어가는 일이다. 입체공간 미디어는 단순한 차세대 미디어 기술이 아니라, 대한민국 미래 성장의 핵심 인프라이자 새로운 산업 생태계의 기반이 될 것이다.

이제는 국내외 산·학·연이 개방과 협력의 생태계를 함께 구축하고, 대한민국이 다가오는 입체공간 미디어 시대를 선도할 기반을 마련해야 할 때다. 대한민국이 기술을 소비하는 나라가 아니라 미래 미디어 기술 생태계를 설계하고 세계와 함께 만들어가는 나라가 되기를 기대한다.

이러한 도전은 새로운 산업과 일자리를 창출하고, 국민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은 물론, 대한민국이 미래 미디어 산업의 글로벌 표준과 시장을 선도하는 디지털 강국으로 도약하는 든든한 토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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