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현철 논설실장
프랑스 화가 장 바티스트 아르망 기요맹(Jean-Baptiste Armand Guillaumin, 1841~1927)의 ‘이브리의 일몰’(Soleil couchant a Ivry·Sunset at Ivry, 1873)은 초기 인상주의 걸작으로 꼽힌다. 미술사 최초로 산업화 풍경과 인상주의를 결합한 작품으로, 가난과 노동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았던 기요맹의 예술 혼이 잘 드러난다.
19세기만 해도 풍경화는 신화 속 낙원이나 아름다운 시골 전원을 그린 그림을 의미했다. 하지만 기요맹은 파리 남동쪽 교외의 공업지대인 이브리의 공장 지대를 과감하게 화폭에 담았다. 붉고 황금빛으로 타오르는 하늘을 배경으로, 거대한 공장 굴뚝들이 검은 연기를 뿜어내고 있다. 기요맹은 이 연기를 단순한 공해가 아니라, 당시 역동적으로 발전하던 근대 파리의 상징이자 ‘승리의 깃발’처럼 당당하게 묘사했다.
이 그림은 1874년 파리에서 열린 역사적인 ‘제1회 인상주의 전시회’에 출품돼, 인상주의라는 이름을 탄생시킨 클로드 모네의 명작 ‘인상, 해돋이’(Impression, Sunrise)와 나란히 전시됐다. 모네의 작품이 아침 안개 속 푸른 빛과 떠오르는 태양을 포착했다면, 기요맹의 작품은 저물어가는 하늘의 폭발적인 오렌지빛과 보랏빛 음영을 담았다. 두 작품 모두 거친 붓터치로 순간의 빛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완벽한 예술적 대화를 보여줬다.
제1회 인상주의 전시회는 미술계에 거대한 폭탄을 던진 일대 사건이었다. 당시 관람객과 비평가들은 르네상스 이래 수백년간 이어온 매끄럽고 완벽한 그림에 익숙해 있었다. 따라서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고 붓 자국이 그대로 남은 인상파의 그림은 “그리다 만 쓰레기”로 보였다. 비평가 루이 르루아(Louis Leroy)는 모네의 ‘인상, 해돋이’를 보고 “초벌칠도 안 끝난 벽지 도안이 이 그림보다 훨씬 완성도가 높겠다”라며 ‘인상주의’(Impressionism)라는 말을 모욕적인 조롱의 의미로 처음 만들어냈다.
기요맹의 ‘이브리의 일몰’ 역시 비평가들의 집중 포화를 맞았다. 평론가들은 “아름다운 자연을 그려도 모자랄 판에, 시커먼 공장 연기와 지저분한 도심 변두리를 캔버스에 담았다”라며 “미학적 가치가 전혀 없는 저질스러운 주제”라고 깎아내렸다.
기요맹은 이 그림을 그릴 당시, 파리 시청 토목과에서 일주일에 사흘씩 야간 노동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밤새 고된 육체노동을 마치고 피곤한 몸을 이끈 채, 오직 빛을 보기 위해 낮 시간에 센 강변으로 나와 야외 사생을 하며 강렬한 풍경을 완성했다. 노동자로 바라본 일터와 도시의 풍경이었기에, 모네나 다른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보다 훨씬 더 묵직하고 거친 현실적 생동감이 묻어난다. 빈센트 반 고흐의 마지막 주치의이자 인상파 화가들의 열렬한 후원자였던 폴 가셰 박사(Dr. Paul Gachet)가 그림의 가치를 알아보고 재정적으로 쪼들리던 기요맹을 돕기 위해 그림을 샀다.
기요맹은 센 강변 그림을 많이 남겼다. 이브리 바로 건너편에 위치한 샤랑통 지역의 강변을 그린 ‘샤랑통의 센 강’(The Seine at Charenton) 연작, 와인 물류 허브였던 베르시 부두를 배경으로 한 ‘베르시의 센 강’(The Seine at Bercy) 연작 등이 그것이다. 강물 위를 바쁘게 오가는 증기선과 산업용 바지선, 그리고 강변에서 무거운 짐을 나르는 노동자들의 모습이 등장한다. 자연의 아름다움보다는 근대 도시를 지탱하는 거친 에너지와 노동의 숭고함을 인상주의 기법으로 포착한 독보적인 연작이다. 기요맹은 강물에 반사되는 차가운 푸른빛과 공장의 붉은 불빛을 강렬하게 대조시켜 그림의 효과를 극대화했다.
또한 1870년대부터 1890년대까지 이브리 지역을 수십번 반복해 그렸다. 초기에는 빛의 정밀한 포착에 집중했다면, 말년의 이브리 연작은 실제 풍경의 색을 넘어 불타는 듯한 보라색, 주황색, 분홍색 등 주관적이고 야성적인 색채를 폭발시키며 훗날 앙리 마티스 등으로 대표되는 야수파(Fauvism)의 도래를 예고했다.
당시에는 “눈이 썩는 그림”이라며 조롱받았던 센 강변 그림들은 오늘날 19세기 근대 파리의 풍경을 가장 진솔하고 역동적으로 기록한 위대한 유산으로 평가되고 있다.
아르맹의 대표작으론 ‘이브리의 일몰’외에 센 강에 위치한 루이 필립 다리 주변을 그린 ‘루이 필립 다리’(The Bridge of Louis Philippe, 1875), 눈이 쌓인 시골길의 고요한 겨울 풍경을 담은 ‘눈 속의 오목한 길’(Hollow in the Snow· A Path in the Snow, 1869), 크뢰즈 지방의 크로장 마을에 머물며 그린 연작 중 하나인 ‘크로장의 부샤르동 제분소’(The Moulin des Bouchardonnes, Crozant, 1898), 파리 근교의 아름다운 수변 마을인 모레 쉬르 루앵의 풍경을 포착한 ‘모레 쉬르 루앵’(Moret-sur-Loing, 1902)을 꼽을 수 있다.
기요맹의 화풍은 인상주의의 틀 안에서 피어난 야수파의 불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모네나 피사로처럼 빛의 미묘한 변화를 부드럽게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만의 강렬한 주관적 색채와 거친 질감을 캔버스에 쏟아부었다. △불타는 듯한 대담한 색채 (야수파의 선구자) △묵직하고 거친 붓터치와 두터운 질감 (임파스토·Impasto) △근대 도시의 노동 포착 (사회적 인상주의) 등이 특징이다.
기요맹은 다른 인상파 화가들보다 훨씬 더 과감하고 원색적인 색채를 사용했다. 특히 해질녘이나 일출을 그릴 때 짙은 보라색, 불타는 주황색, 강렬한 분홍색, 자작나무 빛깔의 붉은 갈색을 아끼지 않았다.이런 대담한 색채 실험은 훗날 야수파에 지대한 영감을 주었다.
또한 모네의 그림이 공기 중에 녹아내릴 듯 부드럽다면, 기요맹의 그림은 매우 단단하고 묵직한 구조감을 지닌다. 물감을 두껍게 칠해 질감을 그대로 살리는 임파스토 기법을 즐겨 썼다. 캔버스 위에 거칠고 역동적인 붓 자국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화면 전체에서 강렬한 에너지가 뿜어져 나온다. 이 묵직한 필치는 절친이었던 폴 세잔과 정서를 공유하고 있다.
초기 기요맹은 다른 인상파 화가들이 즐겨 그린 부르주아들의 화려한 파티나 평화로운 휴양지에는 관심이 없었다. 낮에 토목 노동자로 일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파리 변두리의 공장 구역, 연기를 뿜는 굴뚝, 강바닥의 모래를 퍼 올리는 준설선, 석탄을 나르는 노동자들의 삶을 진솔하게 담았다. 인상주의 기법으로 근대 산업 사회의 역동성과 노동의 현장을 가감 없이 기록한 독보적인 시선을 가졌다.
그의 후기 화풍은 50세가 되던 1891년 10만프랑(약 40억원)의 상금이 걸린 복권 당첨을 기점으로 극적인 변화를 맞이한다. 목돈이 생긴 후 프랑스 중부의 크로장(Crozant) 마을과 지중해 연안에 정착하면서 작품의 주제가 순수 대자연으로 바뀐다. 화풍 역시 한층 밝아져, 빛을 받아 빛나는 바위와 계곡을 눈이 멀 것 같은 화려한 원색의 조화로 표현하며 회화적 해방감을 완성했다.
기요맹은 19세기 후반 프랑스 파리를 중심으로 활동한 초창기 인상주의 화가이자 석판화가다. 모네, 르누아르 등에 비해 대중적 인지도는 낮지만 폴 세잔, 카미유 피사로, 빈센트 반 고흐 등 거장들과 깊은 교류를 나누며 인상주의 확립에 큰 기여를 한 선구자로 꼽힌다. 인상파 화가들이 개최한 총 8번의 전시회 중 6번 참여했을 만큼 핵심적인 멤버였다.
기요맹은 1841년 2월 16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출생 직후 가족은 물랭으로 이사했고, 그곳에서 초등 교육을 받았다.아버지의 뜻에 따라 파리로 보내져 경영학을 공부하게 됐고, 고모와 고모부의 보살핌을 받았다. 가족의 허락을 받아 이 시기에 미술 수업도 들었다. 가난한 집안 형편때문에 삼촌의 속옷 가게, 프랑스 국영 철도회사, 파리 시청 토목과 등에서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낮에는 도랑을 파거나 철도·교량 관련 인프라 노동을 하고, 저녁과 주말에 짬을 내어 그림을 그렸다. 미술 학원인 아카데미 스위스에서 공부하며 평생의 화우인 세잔과 피사로를 만나 깊은 우정을 맺었다.
기요맹은 소탈하고 온화한 성품 덕분에, 성격이 까다롭거나 고독했던 세잔과 고흐 모두와 깊은 정서적 교류를 나누며 그들의 예술에 큰 영감을 주었다. 세잔과는 1860년대초 아카데미 스위스에서 처음 만나 평생 우정을 이어갔다. 한때 파리 생루이 섬에서 바로 옆방에 작업실을 두고 매일 붙어 다닐 정도로 절친했다. 이들은 인상주의자들의 대부였던 가셰 박사의 집에 모여 동판화(에칭) 실험도 했다. 세잔은 단 5점의 판화를 남겼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기요맹을 모델로 한 ‘목맨 사람 집의 기요맹’(Guillaumin au Pendu)이다.
기요맹은 또한 고흐가 1886~1888년 파리에 머물던 시절,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따뜻하게 격려해준 몇 안 되는 선배 화가였다. 고흐는 파리 안주 부두(Quai d‘Anjou)에 있던 기요맹의 작업실을 자주 방문했다. 작업실과 계단, 심지어 아파트 복도에는 미처 팔지 못한 그림들로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차 있었다.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지난 겨울 기요맹의 작업실을 찾았을 때, 계단과 복도까지 온통 그림으로 꽉 차 있던 풍경이 얼마나 유쾌했는지 모른다”며 그 열정에 찬사를 보냈다.
고흐는 기요맹 특유의 강렬하고 풍성한 색채에 엄청난 충격과 영감을 받았다. 고흐가 파리를 떠나 남프랑스 아를(Arles)로 내려간 뒤 눈이 멀 것 같은 강렬한 노란색과 원색을 쓰기 시작한 배경에는, 파리 시절 기요맹이 보여준 대담한 색채 실험이 있었다.
1890년 7월, 권총 자살을 하기 직전 반 고흐가 마지막으로 파리를 급히 방문했을 때, 기요맹은 오랜 친구인 고흐를 꼭 만나기 위해 간절히 기다렸으나 끝내 대면하지 못했다는 안타까운 기록도 남아 있다.
기요맹은 1927년 파리 남쪽 오를리에서 비극적인 질병이나 가난 속에서 요절했던 고흐나 고갱 등 동시대의 다른 화가들과 달리, 평온하게 노년의 끝을 맞이했다. 다른 인상파 화가들에 비해 비록 명성은 낮았지만 그의 일생은 세상의 빛과 색을 자신만의 열정으로 기록한 여정이었다. 논설실장 hckang@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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