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반도체·자동차·배터리 등 제조 경쟁력 강점
美, AI 빅테크 결집… 中은 정부 주도 실증 속도
글로벌 협력으로 AI 활로… 규모의 한계 넘어야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올 초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2026 특별연설에서 “지금 가장 중요한 단계가 피지컬 인공지능(AI)”이라며 “로보틱스 분야에도 ‘챗GPT 시대’가 도래했다”고 선언했다. 그의 뒤편 화면을 채운 것은 실리콘밸리의 빅테크가 아닌 현대자동차그룹과 LG전자, 국내 스타트업이 선보인 ‘K-로봇’이었다.
황 CEO는 작년 10월 방한 이후 8개월 만인 지난 6월 다시 한국을 찾았다. 지난해엔 그래픽처리장치(GPU) 공급을 약속하면서 ‘깐부’를 맺었다면, 이번 방문에선 ‘형님’으로 한국 AI인프라 생태계와 혈맹을 맺었다.
한국의 피지컬 AI 인프라가 다른 국가에 비해 충분한 경쟁력, 아니 그 위에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장면이다.
◇반도체·자동차 등 제조 인프라 우위
피지컬 AI는 알고리즘만으로 승부하기 어렵다. AI가 현실 세계에서 제대로 작동하려면 반도체와 센서, 모터와 액추에이터, 배터리 등 하드웨어가 필요하고, 이를 실제 공장에서 학습시키고 검증할 수 있는 제조 인프라도 갖춰져야 한다.
AI의 ‘두뇌’뿐 아니라 이를 움직이는 ‘몸통’과 현실 세계의 방대한 데이터가 동시에 필요하다는 의미다.
한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제조 인프라를 구축한 국가로 꼽힌다. 반도체, 자동차, 배터리, 조선, 방산, 원전 등 미래 제조산업의 핵심 분야에서 모두 글로벌 선두권에 있다.
로봇, 자율주행차, AI팩토리 등 기계를 움직이는 게 바로 ‘피지컬 AI’다. 피지컬 AI의 핵심인 제조 데이터 축적에서 한국만한 시장이 없다는 게 황 CEO가 한국을 찾는 이유 중 하나로 꼽힌다.
이 때문에 세계 AI 산업의 판도가 기존과 달라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지금까지 AI 경쟁에서 가장 앞선 미국과 제조업 공급망을 장악한 중국 사이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제조업 기반을 갖춘 한국이 새로운 기회를 잡을 수 있다.
황 CEO가 한국을 찾을 때마다 삼성, SK, 현대차, LG 등 국내 대기업과 지속적으로 협력 관계를 확장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AI반도체를 중심으로 시작된 협력 관계가 피지컬 AI 시대에는 제조·로봇·자동차·배터리 등으로 확장될 가능성이 크다.
◇美 AI-中 피지컬 강점… 천문학 자금력
현재 미국과 중국은 피지컬 AI 시장을 주도하는 양강으로 꼽힌다.
미국은 압도적인 AI 소프트웨어 기술과 자본력을 기반으로 피지컬 AI 시대를 주도하고 있다. 뉴욕 증시를 주도하는 7개 기업 ‘매그니피센트 7’로 꼽히는 엔비디아, 애플, 마이크로소프트(MS), 메타, 아마존, 구글 모회사 알파벳, 테슬라는 모두 피지컬 AI 시대를 이끄는 기업들이다.
생성형 AI 시대를 연 오픈AI를 비롯한 AI 모델 기업과 반도체 설계 기업, 클라우드 기업, 대학과 연구기관이 밀집해 있고 AI 스타트업에 막대한 자본이 몰린다.
한 예로 오픈AI는 올 1분기에만 1220억달러(173조원)를 조달했다. 클로드 개발사인 앤트로픽은 지난 3월 시리즈G에서 300억달러(42조원), 5월엔 650억달러(92조원)를 각각 유치했다. 한국 시장에서의 기업공개(IPO)나 스타트업들의 시리즈 유치 규모와 차원이 다르다.
중국은 세계 최대 수준의 제조업 기반과 압도적인 부품 공급망을 갖췄다. 여기에 정부와 기업의 대규모 지원이 결합되면서 새로운 제품을 빠르게 만들고 현장에 투입하는 능력도 강점으로 꼽힌다. 미국의 수출 통제에도 내부 수급으로만 역량 확보에 나설 수 있는 경쟁력을 갖췄다.
대표적으로 중국 휴머노이드 기업 애지봇은 지난 4월 롱치어 테크놀로지 남창 공장 태블릿 대량 생산 라인에 휴머노이드 로봇을 투입하고, 6월 로봇의 생산 활동을 동영상으로 실시간 보여주면서 기술력을 과시했다. 유니트리는 조만간 중국 로봇 기업 최초로 본토 증시(상하이)에 상장할 예정이다.
◇기술 내재화·인재 확보로 규모의 한계 넘어야
업계에서는 미중 양강의 틈바구니에서 한국이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의 강점인 ‘피지컬’(제조 인프라)에 글로벌 ‘AI’(소프트웨어) 동맹을 더하는 방식이면 가능하다는 것이다. 국내 주요 기업들이 미국 테크 기업들과 지속적인 파트너십을 맺고, 기술 협업에 나서는 것도 이러한 것이 배경이다.
다만 규모의 한계는 넘어야 할 산으로 꼽힌다. 한국은 내수 시장이 상대적으로 작아 자체적으로 실증 데이터를 확보할 여력이 작다. 부품 생태계 역시 중국보다 부족해 내재화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속적인 인재 유출도 막아야 할 핵심으로 거론된다.
삼정KPMG는 작년 8월 ‘미국·중국 AI 경쟁력 비교 및 한국의 대응 전략’ 리포트에서 “한국은 반도체와 시스템 인프라 분야에서 이미 보유한 경쟁 우위를 전략적으로 활용, 부품 공급자 역할을 넘어 AI 생태계의 핵심 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며 “AI인재 확보와 내재적 기술 역량의 강화도 필수적이다. 글로벌 기업들의 인재 유치 경쟁이 심화되는 만큼 기업은 기술자 중심의 조직문화·성장 경로를 설계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정부와 민간이 적극적인 규제 해소와 투자에 나선다면 메모리반도체에 이은 새 ‘금맥’을 캘 수 있다고 조언했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는 “과거 골드러시 상황을 보면 금을 판 사람보다 청바지와 곡괭이를 파는 사람이 돈을 벌었다”며 “피지컬 AI, 자율주행, 데이터센터 등 기회가 많다. 청바지와 곡괭이(반도체)가 AI(금) 시대의 기회 요인”이라고 말했다.
이어 “규제 완화는 돈이 드는 것이 아닌 기회를 열어주는 창”이라며 “규제 완화와 인재 육성을 통해 중국 정부 주도의 추진력과 미국의 상업 투자를 넘어서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장우진·임재섭 기자 jwj17@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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