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현철 논설실장
중국의 무협 영화를 보면 환관(宦官)들이 많이 등장한다. 황제의 권력을 악용해 ‘호가호위’(狐假虎威)하거나 주로 부정적인 이미지로 그려진다. 환관은 중국 역사의 큰 물길을 돌릴 정도로 영향을 미칠 때가 적지 않았다.
환관은 황실의 후궁을 관리하고 황제를 보필하기 위해 성기와 고환을 모두 거세한 뒤 입궁한 남성 관리다. 환자(宦者), 환수(宦竪), 폐환(嬖宦), 중환(中宦), 내환(內宦), 엄인(閹人), 엄자(閹者), 엄수(閹竪), 엄시(閹侍) 등으로도 불린다. 한자의 환(宦)과 엄(閹)은 고자를 뜻한다. 황실의 노비나 수행원에 불과했으나, 가까운 자리에서 황제를 보필한다는 점을 악용해 조정의 관료들을 제치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왕조의 흥망성쇠에 거대한 영향을 미쳤다.
중국의 환관은 고환만 제거했던 조선의 내시와 달리, 음경과 고환을 모두 잘라내는 극단적인 방식을 취했다. 수술 후 요도를 보존하기 위해 대롱을 끼웠으나 소변을 잘 가리지 못해 몸에서 특유의 냄새가 났다. 잘라낸 신체 부위는 함에 담아 보관하다가 죽을 때 무덤에 함께 묻혔다.
환관은 수많은 후궁과 궁녀가 모여 사는 구중궁궐에서 황제 외에 다른 남성의 씨가 섞이는 것을 원천 차단하기 위해 고안됐다. 황제 혈통의 순수성을 지킨다는 명목의 희생양이었던 셈이다. 황제들은 세력이 커진 외척(황후의 가문)이나 사대부 관료 집단을 견제하기 위해, 자신에게 절대 복종하는 환관을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환관 중에는 중국 최초의 역사서인 ‘사기’(史記)를 쓴 사마천(司馬遷)이나 종이를 발명한 후한의 채륜(蔡倫), 명나라때 대항해를 이끈 이슬람 출신 환관인 정화(鄭和) 등도 있었지만, 황제 대신 권력을 좌지우지함으로써 나라를 망친 악인이 훨씬 많았다. 중국 역사에는 악명 높은 4대 환관으로는 조고, 십상시, 유근, 위충현이 꼽힌다.
조고(趙高. ? ~ 기원전 207년)는 진(秦)나라를 파멸로 이끈 희대의 간신이자 권력욕의 화신이다. 중국 대륙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의 유언을 조작, 진시황의 막내 아들 호해(胡亥)를 황제로 옹립했다. 조고와 관련된 유명한 고사성어가 ‘지록위마’(指鹿爲馬)다. 권력을 장악한 조고는 조정에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이 있는지 시험하기 위해 황제와 신하들 앞에서 희대의 연극을 벌인다. 호해 황제에게 사슴 한 마리를 바치며 “좋은 말(馬)입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황제가 “사슴을 보고 말이라니 무슨 소리냐”며 웃자, 조고는 신하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이에 말이 맞습니다”라고 아부한 신하들은 살아남았고, 사실대로 “사슴입니다”라고 말한 바른 신하들은 처형당하거나 쫓겨났다.
조고는 진나라가 진승·오광의 난 등 사방에서 일어난 농민 반란으로 무너지기 시작하자, 책임 추궁을 피하기 위해 자신이 세운 호해 황제마저 자살하게 만든다. 이후 진왕 자영(子嬰)을 세번째 왕으로 세웠으나, 조고의 간악함을 잘 알고 있던 자영의 계책에 걸려들어 결국 자객에 살해당하고 삼족(三族)이 멸하는 최후를 맞이한다. 진나라가 통일 이후 겨우 15년만에 망한 건 조고 탓이 컸다.
십상시(十常侍)는 후한(後漢) 말 12대 황제인 영제(靈帝) 때, 조정의 권력을 장악하고 국정을 농단해 나라를 파멸로 이끈 환관의 무리다. 장양(張讓), 조충(趙忠), 곽승(郭勝), 손장(孫璋) 등 12명의 환관들을 뜻하는데, 그 중 열 명이 사적 조직을 만들어 십상시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들은 영제의 눈과 귀를 가리고 조정을 장악해 후한의 멸망과 위·촉·오(魏·蜀·吳) 삼국 시대의 서막을 열었다. 십상시는 모든 관직을 돈을 받고 팔았으며, 돈을 주고 자리를 산 관리들은 본전을 뽑기 위해 백성들을 가혹하게 수탈했다. 횡포를 견디다 못한 백성들은 종교 집단인 태평도를 중심으로 거대한 농민 반란인 ‘황건적의 난’을 일으켰고, 이는 후한의 멸망과 삼국 시대의 개막을 열리는 도화선이 된다.
기원전 189년, 영제가 사망하자 권력을 잡기 위해 외척 세력(대장군 하진)과 환관 세력(십상시) 간의 피비린내 나는 암투가 벌어진다. 십상시는 대장군 하진을 궁궐로 유인해 먼저 목을 베어 버렸으나 이에 분노한 원소, 조조 등 하진의 부하들이 군대를 이끌고 궁궐로 들이닥쳐 수염이 없는 환관 및 의심자 2000여 명을 무차별 학살했다. 수장 장양 등은 어린 소제 황제를 납치해 도망치다가 강물에 뛰어들어 자살하며 십상시 집단은 전멸했다.
유근(劉瑾, 1451년 ~ 1510년)은 명(明)나라 10대 황제 정덕제(正德帝) 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간신이자 역사상 가장 부유했던 환관이다. 6살 때 환관이 된 유근은 훗날 정덕제가 되는 주후조 태자의 유년 시절 시종을 맡으며 두터운 신임을 쌓았다. 1505년 15세의 어린 정덕제가 즉위하자 유근은 사냥, 가무, 라마교 등 온갖 자극적인 유흥거리를 제공해 황제가 정무에 관심을 끄게 만들었다. 화려한 별궁인 ‘표방’(豹房)을 지어 황제를 그곳에 가두고 향락에 빠뜨린 것도 유근의 계책이었다. 이렇게 황제를 따돌리고 유근은 8명의 악독한 환관인 ‘팔호’(八虎)이 우두머리로 온갖 악행을 일삼았다.
유근은 자신에게 반대하는 신하들을 탄압하기 위해 조정에서 바지를 벗기고 엉덩이를 때리는 가혹한 형벌인 ‘정장’(廷杖)을 무더기로 가했다. 당대 최고의 유학자인 왕양명(왕수인)도 유근에게 직언을 올렸다가 매를 맞고 변방으로 귀양을 가야 했다. 그리고 매관매직으로 상상을 초월한 뇌물을 긁어모았다. 훗날 그가 체포된 후 집에선 황금 약 1200만냥(약 450톤), 은자 약 2억5000만냥, 엄청난 양의 보석, 보검, 황제의 가짜 옥새 등이 나왔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001년 ‘지난 1000년간 세계 최고의 부자 50인’에 그의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유근의 탐욕은 결국 파멸을 불렀다. 1510년, 유근과 권력을 다투던 또다른 팔호 출신의 환관 장영이 유근이 황제를 몰아내고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증거와 가산 내역을 정덕제에게 밀고했다. 믿었던 유근이 숨겨둔 엄청난 재산과 황제 위를 찬탈하려 한 정황을 직접 확인한 정덕제는 대노해 능지처참(凌遲處斬)을 명했다. 유근은 사흘 동안 무려 3357번 칼질을 당해 살점이 조금씩 베어져 나가는 고통 속에서 죽어갔다. 그의 수탈에 넌더리를 쳐야했던 백성들은 유근의 잘려 나간 살점을 사서 씹어 먹으며 분풀이를 했다고 전해진다.
위충현(魏忠賢, 1568 ~ 1627년)은 명나라 말기 15대 황제 천계제(天啓帝) 때 나라를 멸망의 길로 밀어 넣은 중국 역사상 최악의 환관으로 꼽힌다. ‘호가호위’의 정점을 찍은 인물이며, 스스로를 황제에 버금가는 존재로 신격화했던 권력욕의 화신이다.
위충현은 젊은 시절 고향에서 도박 빚에 시달리다 빚쟁이들을 피해 스스로 거세하고 궁궐의 환관으로 들어갔다. 글자도 모르는 문맹이었으나 눈치가 빠르고 아부를 잘했다. 훗날 황제가 되는 황손(천계제)의 유모였던 객씨(客氏)와 내통해 궁궐 내 권력을 잡았다. 1620년, 16세의 나이로 천계제가 즉위했다. 천계제는 ‘목공(나무 깎기) 마니아’였다. 위충현은 황제가 한창 나무를 깎고 가구를 만들며 몰두해 있을 때만 찾아가 “폐하, 결재 문서입니다”라고 귀찮게 굴었고, 짜증이 난 황제는 “네가 알아서 해라”라며 전권을 넘겨주었다.
위충현은 황제를 부르는 만세(萬歲) 바로 밑인 구천세(九千歲)로 자신을 부르게 했다. 조정의 관리들은 황제보다 위충현에게 먼저 절을 올렸다. 위충현에게 아부해 권력을 얻으려는 관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는데, 이들은 ‘엄당’(閹黨)으로 불렸다. 위충현은 정보기관이자 특무기구인 ‘동창’(東廠)을 손아귀에 쥐고, 자신에게 반대하는 선비 집단인 동림당(東林黨) 신하들을 간첩, 반역 등의 죄명을 씌워 잔혹하게 고문하고 학살했다. 위충현의 권력이 하늘을 찌르자, 지방의 관료들은 전국 각지에 위충현의 동상을 세우고 살아있는 그를 신으로 모시는 ‘생사당’(生祠堂)을 짓기도 했다.
1627년, 천계제가 22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고 동생인 숭정제(崇禎帝)가 즉위하면서 위충현의 세상도 끝났다. 형과 달리 영명하고 강단 있는 숭정제는 즉위 직후 조용히 위충현의 세력을 약화시킨 뒤, 그를 봉양(鳳陽)으로 유배보냈다. 유배를 가던 도중, 숭정제가 자신을 체포해 능지처참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은 위충현은 군사들이 들이닥치기 전 목을 매어 자살했다. 그가 죽은 후 숭정제는 그의 시신을 토막 내고 거리에 매달았으며, 유모 객씨를 비롯한 위충현의 엄당 세력 수백명을 모두 처형하고 재산을 몰수했다. 명나라는 위충현이 죽은 지 불과 17년 만(1644년)에 이자성의 난과 청나라의 침공으로 멸망하게 된다. 후대의 역사가들은 “명나라는 군주가 아니라 환관 위충현 때문에 망했다”고 평가했다.
중국의 환관 제도는 기원전 은나라 시대부터 시작돼 명나라 시절 최고조에 달했으며, 1912년 청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약 3000년동안 지속됐다. 환관들이 권력을 유지하고 반대파를 숙청하기 위해 운영한 정치·정보기구들은 매우 강력하고 잔혹했다. 특히 환관의 권력이 정점에 달했던 명나라때 극성이었는데, 무협 영화나 무협지의 단골 소재이기도 하다.
명나라는 황제 직속의 비밀경찰 기구인 ‘창위(廠衛)’를 운영했다. ‘위’는 관료 중심의 금의위이고, ‘창(廠)’은 환관들이 수장이 돼 이끈 정보기구다.
동창(東廠)은 3대 황제 영락제가 세운 최초의 환관 정보기구다. 조정 관료, 황족, 일반 백성까지 전방위로 감시·도청했으며, 사법 기구를 거치지 않고 독단적으로 체포와 고문을 행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다.
당시 환관들이 지휘하는 비밀경찰 감옥(진무시)에서 자행된 고문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잔혹했다. 쇄후(鎖喉, 목 조르기)는 죄수의 목에 무거운 철쇄나 칼을 씌우고 이를 벽이나 바닥에 고정, 조금만 움직여도 목이 졸리거나 뼈가 부러지게 만드는 고문이다. 협척(夾脊,- 척추 누르기)은 죄수를 엎드리게 한 뒤 척추와 등뼈 사이에 단단한 나무나 철봉을 끼우고 짓눌러 뼈를 으스러뜨리는 형벌이다. 위충현 시절의 환관들은 장형(杖刑, 매질)을 동창의 앞마당에서 집행하며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뼈가 드러날 때까지 때려 죽음에 이르게 했다.
서창(西廠)은 8대 성화제 때 동창의 감시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추가로 설치된 기구다. 동창보다 더 잔혹하고 비대해져 설치와 폐지를 반복했다. 내행창(內行廠)은 악명 높은 환관 유근이 만든 기구다. 백성과 관료는 물론, 기존의 동창과 서창, 금의위까지 감시하는 ‘정보기구 위의 정보기구’였다.
비밀경찰이 물리적인 폭력이었다면, ‘사례감’(司禮監)은 황제의 결재권을 대행하는 제도적 권력이었다. 궁중 내 12개 환관 부서 중 가장 우두머리 기구다.
환관의 발호로 명나라가 망하는 것을 본 청나라는 환관의 정치 개입을 철저히 금지했다. 대신 환관들의 기구를 철저히 실무형으로 축소했다. 경사방(敬事房)은 청나라 환관들이 소속된 핵심 기구로, 이들의 주 업무는 황제의 잠자리 통계 및 관리였다. 황제가 밤에 부를 후궁의 이름표(녹두패)를 바치고, 황실의 혈통을 증명하기 위해 방사 날짜와 시간을 정확히 기록하는 역할에 한정됐다.
강현철 논설실장(hckang@dt.co.kr)실시간 주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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