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재근 문화평론가
방탄소년단이 얼마 전에 그래미상 출품 거부를 선언해 세계적으로 화제가 됐었다. 이것은 단순한 가십 정도의 이슈가 아니라 팝의 역사에 전례가 없는 일이며, 팝의 권력지형을 뒤흔든 사태라는 점에서 역사적인 사건이라 할 만하다.
그래미 거부 선언 자체는 전례가 있다. 있어도 아주 많이 있다. 2017년 흑인인 비욘세가 명반을 냈는데도 백인인 아델에게 그래미 올해의 앨범상이 돌아가자 많은 이들이 공분했고, 아델은 트로피를 쪼개면서 “올해의 앨범은 비욘세의 것”이라고 말했다. 2021년엔 흑인인 위켄드가 초대형 히트곡을 냈는데도 그래미측은 그를 후보에조차 올리지 않았다. 이 일은 ‘위켄드 스넙’(Snub, 무시하다) 사건으로 알려지며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마이클 잭슨 1집이나 켄드릭 라마 등도 그래미로부터 외면 받았었다.
이런 일들이 누적되며 그래미가 백인 중심의 인종차별적 행태를 보인다는 인식이 굳어졌다. 그 결과 위켄드, 비욘세, 제이지, 아리아나 그란데, 저스틴 비버, 칸예 웨스트, 드레이크, 원디렉션의 제인 말리크, 니키 미나즈, 위즈 칼리파, 테야나 테일러, 피오나 애플, 에미넴 등이 일시적 또는 장기간 동안 그래미 거부 움직임을 보여왔다.
이렇게 거부 선언이 많았었지만 방탄소년단의 거부 선언이 매우 특별한 것은 그들이 한국 가수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그래미를 거부했던 이들은 영어권의 대형 팝스타들이었다. 그래미급 뮤지션이라고 누구나 생각하는 스타들이 거부 선언을 했기 때문에 그것이 화제가 됐던 것이다.
반면 한국은 과거 그래미상과 상관이 없는 나라라고 여겨졌었다. 어느 한국 가수가 갑자기 그래미 거부 선언을 했어도 아무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나라 팝팬들은 그래미 시상식을 마치 어떤 닿을 수 없는 높은 곳에서 펼쳐지는 궁극의 팝 이벤트 정도로 선망했다. 그래미상의 권위도 절대적으로 여겨졌다. 그래미상을 정점으로 하는 암묵적인 위계 관계가 형성됐던 것이다.
방탄소년단의 거부 선언은 이런 위계 관계가 전복됐음을 의미한다. 방탄소년단이 한국에서 한국어로 거부 선언을 했는데도 바로 다음날 그래미측 CEO가 해명을 내놨다. “방탄소년단이 참여하지 않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슬펐다. 아시안팝 부문은 (아시아) 아티스트들을 특별히 조명하기 위한 것일 뿐 구분 지으려는 것이 아니다. 장르 카테고리에 음악을 출품한다고 해서 본상 부문에서 제외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내용이다.
과거 같았으면 한국에서 한국 가수가 한국어로 그래미 거부선언을 아무리 해도 그래미가 반응하지 않았을 텐데 이번엔 CEO가 즉시 반응한 것이다. 미국 팝스타가 거부선언을 해도 이 정도까지 기민하게 반응하진 않는다. 그래미 측의 이런 반응만 보더라도 방탄소년단이 팝의 거물로 인정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래미상과 우리 한국 가요계 사이엔 암묵적인 위계 관계가 있었고 우리 가수들은 그래미의 선택을 영광이라고만 여겼었다. 방탄소년단도 처음엔 그래미에 대한 열망을 숨김없이 드러냈었다. 하지만 이젠 독자적인 목소리를 낼 정도로 그래미와 대등한 입장에 올라섰다. 오히려 그래미 측이 방탄소년단의 거부에 더 아쉬워하는 느낌이다. 서구 언론이나 누리꾼들도 이번 거부로 방탄소년단보다 그래미가 더 타격을 크게 받을 것이란 분위기다.
사건의 발단은 그래미의 아시안팝 부문 신설이었다. 그래미는 아시아의 아티스트들을 조명하기 위한 것이라는 입장이지만, 많은 이들은 케이팝 격리를 위한 꼼수라고 의심했다. 케이팝에게 본상을 주지 않으려고 아시안팝이라는 부문을 만들어 격리했다는 것이다. 그래미는 해마다 방탄소년단을 초청해 시청률을 올려왔지만 상을 주진 않았었다. 이번에 또 초청하려면 상을 안 줄 수 없다보니, 방탄소년단 본상 수상을 막기 위해 아시안팝상을 급조한 것 아닌가라는 의혹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방탄소년단의 거부 선언이 나오자 미국 코스모폴리탄은 “방탄소년단이 아시아 팝 부문 상을 거부한 건 옳았다”고 했고, 빌보드는 “그래미 시상식은 탄탄한 시청자 층을 잃게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그래미가 그동안 백인중심주의 논란을 자초했기 때문에 여론이 방탄소년단 지지로 흐른 것이다.
방탄소년단의 거부로 그래미는 시청률과 권위에 모두 타격을 받을 상황이다. 팝의 변방 정도로나 여겨졌던 한국의 가수가 팝의 정점이라던 그래미를 뒤흔든 것이다. 정말 역사에 보기 드문 전복적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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