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부터 글(文)은 ‘출세’(出世)와 ‘추락(墜落)을 가르는 양날의 칼이었다. 명문장(名文章)은 권력과 부, 명예를 얻을 수 있는 길인 동시에, 그와는 반대로 나락으로 떨어지는 단초가 되기도 했다. 중국의 역사에서 보면 글을 올가미 삼아 그 글을 쓴 사람을 지옥으로 떨어뜨리는 ‘문자옥’(文字獄) 사건이 많았다. 현대에서도 종종 벌어지는 일종의 ‘필화 사건’이다.

‘문자옥’은 단순히 글을 잘못 써서가 아니다. 그 뒷면에 자리잡은 진실은 음습한 ‘권력 투쟁’이다. 특히나 왕조나 정권의 정통성이 취약하거나, 권력을 1인에게 집중시키려 할 때 극에 달했다.

문자옥의 역사는 진(秦)나라 때의 ‘분서갱유’(焚書坑儒)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을 통일한 시황제(秦始皇·진시황)는 승상(재상)이었던 이사(李斯)의 권유대로 사상 통제를 위해 책을 불태우고(분서) 학자들을 산채로 묻어 죽였다(갱유).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사상 탄압 사건이다.

명(明) 나라를 세운 홍무제(洪武帝) 주원장(朱元璋)도 글을 권력 강화의 수단으로 이용했다. 비천한 승려 출신이라는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던 그는 신하들이 올린 축하 표문(表文)에서 빛 ‘광’(光) 자나 대머리 ‘독’(禿) 자만 보아도 자신을 모욕한다며 목을 베었다. 이 글자들이 ‘승려의 빛나는 대머리’(光頭)를 연상시켜, 자신이 중이었다는 사실을 은근히 비꼬고 조롱한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더 나아가 날 ‘생’(生) 자는 중국어 발음으로 승려(僧)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다스릴 ‘치’(治)’자는 도둑 ‘적(賊)’ 자와 음이 통한다며 수많은 고위 관료와 지식인을 학살했다. 권력자의 비틀린 콤플렉스가 글자 몇 개를 이유 삼아 수많은 목숨을 빼앗은 것이다.

명 이전의 문인(文人)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인 소식((蘇軾 ·소동파 蘇東坡)은 ‘오대시안’(烏臺詩案) 사건으로 유배를 떠나야 했다. 조정에서 추진하는 왕안석의 신법(新法·새 정책)을 비판했다는 것이다. 오대(烏臺)는 사법·감찰 기관이었던 어사대(御史臺)의 별칭이다. 어사대 마당에 있는 나무에 까마귀(烏)들이 많이 둥지를 틀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오대시안은 ‘어사대에서 조사한 시(詩) 사건’이라는 뜻이다.

소동파의 정적들이 “조정을 비방하고 황제를 능멸했다”며 꼬투리를 잡은 시와 글은 청묘법(靑苗法·왕안석이 추진한 신법 중 하나로, 농민을 보호하고 재정을 확충하기 위한 국가 주도의 저리 대출 제도)을 비판한 ‘산촌오절’(山村五絕), 새 관직(호주지사)에 임명된 후 황제에게 올린 감사 편지인 ‘호주사표’(湖州謝表) 등 무려 59편에 달한다. 비판 세력들은 그의 시구들을 샅샅이 뒤져 “황제를 비방하고 조정을 모독했다”고 모함했으며, 소동파는 오대에 갇혀 모진 고문을 당한 후 겨우 목숨만 건져 황주로 유배된다.

만주족이 한족을 지배했던 청(淸)나라는 문자옥의 잔혹한 전성기였다. 1726년 제5대 황제인 옹정제(雍正帝) 시절 강서성 향시의 감독관이던 사사정(査嗣庭)은 ‘시경’(詩經)에 나오는 ‘유민소지’(維民所止·백성이 멈추어 쉴 곳)를 시험 문제로 출제했다. 그러나 옹정제는 이 문구의 ‘유’(維)와 ‘지’(止) 자가 옹정제의 연호인 ‘옹정’(雍正)의 윗부분을 잘라낸, 즉 황제의 목을 베겠다는 참수(斬首)를 암시한다며 그를 체포했다. 사사정은 감옥에서 참혹하게 죽었고 시신은 부관참시당했다. ‘파자’(破字), 즉 억지 정황을 만들어 반대파를 학살한 것이다. 파자(破字)는 한자의 자획을 나누거나 합쳐서 새로운 뜻을 만들어내거나, 수수께끼를 푸는 글자 놀이다.

옹정제의 아버지인 강희제(康熙帝) 시기 발생한 ‘장정롱(莊廷鑨)의 명사(明史) 사건’은 지식인 사회를 통째로 초토화했다. 학자였던 장정롱이 역사책 ‘명사집략’(明史輯略)에 청나라 황제의 이름을 그대로 적고 명나라 연호를 썼다는 이유로, 이미 죽은 저자의 시신은 토막 났으며 책의 서문을 쓴 문인, 교정을 본 학자, 인쇄업자, 심지어 책을 사서 읽은 독자까지 70여명이 줄줄이 참수당했다.

강희제, 옹정제를 이은 6대 황제인 건륭제(乾隆帝)때는 청나라 역사상 문자의 옥이 가장 많이 발생한 시기(130여 건)다. 그중에서도 ‘호중조‘(胡中藻) 사건이 가장 악명 높다. 한림원(翰林院) 시독학사(侍讀學士)였던 호중조(胡中藻)가 쓴 시 중 ‘일파심장론탁청’(一把心腸論濁淸·한 줌 마음으로 흐림과 맑음을 논하고 싶구나)라는 구절이 문제가 됐다. 감히 신성한 국호인 ‘청’(淸)나라 앞에 ‘탁할 탁’(濁) 자를 붙여 왕조를 ‘탁한 청나라’라고 모욕했다는 억지 이유다. 호중조는 참수당했고, 그를 추천했던 조정의 거물급 대신들까지 대거 유배를 가거나 파면됐다.

건륭 연간에 호(胡), 융(戎), 이(夷), 노(㺐), 적(狄) 등 오랑캐를 뜻하는 글자를 무심코 썼다가 문자옥에 연루되어 죽은 자들은 부지기수였다.

이런 문자옥은 현대 중국공산당 정권에 그대로 이어진다. 권력투쟁에서 실각의 위험을 느낀 마오쩌둥(毛澤東, 모택동)은 1965년 역사학자 오함(우한, 吳晗)이 쓴 경극 대본 ‘해서파관’(海瑞罷官)의 구절을 중국 정치와 수천만명의 희생자를 낳은 밀어넣은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에 악용한다. 명나라의 청백리 해서가 황제에게 직언하다 파면당한 역사적 사실을 다룬 이 대본은, 마오쩌둥의 실책을 비판하다 해임된 팽덕회(彭德懷)를 옹호했다는 황당한 트집을 잡혀 저자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

이에 앞서 1957년 ‘반우파 투쟁’ 때도 마음껏 비판하라는 말에 속아 당의 정책을 지적했던 문인과 학자 55만명이 마오쩌둥에 의해 순식간에 ‘우파 분자’로 낙인찍혀 수용소로 끌려갔다.

오늘날 시진핑(習近平) 체제의 중국은 고도의 기술력을 결합한 이른바 ‘디지털 문자옥’의 시대를 열었다. 최고지도자의 이름이나 톈안먼 사태 같은 금기어는 기본이다. 감시를 피하고자 최고지도자의 성(姓)인 ‘익힐 습(習)’ 자를 쪼개어 표현하거나, 귀여운 만화 캐릭터인 ‘곰돌이 푸’ 사진을 올리는 해학적 표현마저 샅샅이 검열당한다. 인공지능(AI)과 수만 명의 사이버 공안이 달라붙어 ‘글자의 올가미’를 찾아내 계정을 폭파하고 당사자를 연행한다. 2021년 홍콩 민주화의 상징이었던 빈과일보(蘋果日報, Apple Daily)가 정권을 비판하는 사설을 실었다는 이유로 자산이 동결되고 강제 폐간당했을 때, 홍콩 언론인들이 통탄하며 외친 “홍콩에 문자옥이 강림했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중국의 문자의 옥은 단순한 말실수 교정이 아니라, “왕의 권위에 털끝만큼이라도 도전할 수 있는 상상력 자체를 통제하겠다”는 강력한 독재 체제의 산물이었다. 역사는 문자옥의 결말을 명확하게 증언한다. 지식인들은 시 한 줄 잘못 썼다가 삼족이 멸할 수 있다는 공포 속에서 현실 정치를 외면했다. 그 결과 지식인 사회는 경전의 글자만 파고드는 기형적인 고증학(考證學)에만 매몰됐고, 사회의 건강한 비판 기능과 견제 장치를 상실한 명·청 왕조는 내부로부터 썩어 들어가며 몰락의 길을 걸었다.

글을 올가미 삼아 권력을 유지하려는 독재는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 인간의 생각을 일시적으로 통제할 수 있을지언정, 억압된 분노까지 영원히 가둘 수는 없기 때문이다. 표현의 자유를 저해하는 모든 독재 권력의 끝은 자멸(自滅)뿐이라는 사실을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강현철 논설실장(hckang@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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