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병일 플루토미디어 대표

6·3 지방선거가 끝난 뒤 광화문광장 ‘감사의 정원’은 조용했다. 두 달 전만 해도 나라가 두 쪽 날 듯 시끄럽던 곳이었다. 그런데 며칠 전, 그 정적을 예쁜 노랫소리가 깨뜨렸다. ‘고향의 봄’. 에티오피아 6·25 전쟁 참전용사 후손들로 구성된 ‘강뉴합창단’이 지난 22일 저녁 감사의 정원에 서서 이 노래를 한국어로 불렀다. 강뉴합창단과 서울시 예술단이 함께한 문화교류 공연 ‘그날의 용기, 오늘의 노래’에서다.

6·25 전쟁에서 우리를 도와 참전한 에티오피아 강뉴부대의 헌신을 기억하기 위한 자리. 선진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현대식 빌딩이 즐비한 광화문의 6·25를 기억하는 장소에서, 아이들이 노래하고 춤췄다. 그것이 75년 전 군인들이 목숨을 걸고 지키려 했던 대한민국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이를 옆에서 참전용사 테스파예 아스마마우(95)옹이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강뉴부대는 1951년 지구 반대편에서 왔다. 21일 걸려 바다를 수송선으로 건너온 1200여 명의 청년들.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전투부대를 보낸 나라였다. 정예 황실근위대를 중심으로 부대를 편성했고,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적을 격파하라는 ‘강뉴’라는 이름을 붙였다. 황제는 “이길 때까지 싸워라. 그렇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싸워라”라고 지시했고, 전과는 전설로 남았다. 253전 253승. 단 한 번도 고지를 적에게 넘겨주지 않았으며, 유엔군 참전국 중 단 한 명의 포로도 나오지 않은 유일한 부대였다.

정전 후에는 피로 받은 월급을 모아 동두천에 ‘보화원’이라는 고아원을 세워 한국의 전쟁고아들을 돌보았다. 이 숭고하고 대가 없는 사랑을 지금 우리는 기억하고 있는지. 그 후손들이 2026년 여름 밤 광화문 감사의 정원에 섰다. 할아버지가 피를 흘렸던 나라에서 손자와 증손자들은 노래를 불렀다.

두 달 전만 해도 감사의 정원을 둘러싼 풍경은 달랐다. 선거를 앞둔 정치가 6·25에 대한 기억을 집어삼켰다. 당시 서울 시장의 반대 진영에서는 높이 6.25미터의 돌기둥 23개를 두고 ‘받들어총’을 떠올리게 하는 위압적 군사주의의 상징이라고 비난했다. 206억원이 소요된 건립 비용이 과도하다고 했고, 광화문과 어울리지 않으니 철거하라는 주장도 나왔다. 22개 참전국의 희생을 기억하자는 감사의 공간은 어느새 오세훈을 지지하느냐 반대하느냐를 가르는 표지가 됐다.

그런데 선거가 끝나자 관련 논쟁은 놀라울 만큼 조용해졌다. 광화문을 군사광장으로 만들었다던 분노도, 철거를 외치던 목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정쟁의 소재는 다음 표적으로 이동했다. 이런 망각에 감사해야 하는 걸까. 철거를 주장하던 이들이 감사의 정원을 잊어준 것에 고마워해야 하나. 그들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이동한 덕분에 감사의 정원은 비로소 감사의 공간이 됐다. 관광객들이 걸터앉아 쉬고, 자국의 기둥을 어루만졌다. 에티오피아 참전용사의 손자손녀들이 정원에 서서 노래했고 시민들은 정치 구호 없이 그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정치의 망각이 공간을 본래 주인공에게 돌려준 셈이다. 그 주인은 오세훈도, 반대 단체도 아닌, 75년 전 이름 모를 한국을 위해 싸운 병사들이다.

감사의 정원은 단순히 과거를 위한 시설이 아니다. 대한민국이 어떤 세계에 속해 있고, 앞으로 어떤 나라로 남아야 하는지를 말하는 장소다. 폐쇄와 고립이 아니라 개방과 연대, 침략자의 편이 아니라 침략당한 나라를 돕는 편에 서겠다는 표시다. 도움받던 나라가 도움주는 나라가 됐다는 자랑은, 도움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않을 때만 품격을 갖는다.

감사는 약자의 비굴함이 아니라 강자의 품격이다. 가난했던 과거를 지우고 싶어 하는 졸부는 은인을 불편해한다. 성숙한 국가는 은인의 이름을 수도 한복판에 새긴다. 감사의 정원은 대한민국이 어느 쪽인지를 말해주고 있다.

4만명이 넘는 유엔군 전사자와 22개국의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날 자유민주주의와 글로벌 해양질서에 합류한, 반도체와 자동차를 수출하고 K팝, K뷰티, K푸드, K드라마에 전 세계가 주목하는 ‘케이 에브리싱’(K-Everything) 대한민국의 기적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광화문을 지날 때 한 번쯤 남쪽에서 열여덟 번째인 에티오피아 기둥 앞에 잠시 서보자. 연인원 3518명이 참전해 122명이 숨지고 536명이 다쳤던 에티오피아다. 전사자가 3만6574명으로 가장 많았던 미국, 그리고 영국(1106명), 튀르키예(900명) 등 다른 22개 참전국들의 기둥도 따듯하게 어루만져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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