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대국 러시아에서 요즘 믿기 어려운 장면이 펼쳐지고 있다. ‘연료 대란’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크라이나의 장거리 드론은 정유시설을 집중 타격하고 있고, 그 결과 러시아는 원유는 넘쳐나지만 연료는 부족한 나라가 됐다. 러시아의 강점이었던 에너지가 오히려 최대 약점으로 돌아온 셈이다.

◆우크라 드론 공격에 무너지는 정유공장

러시아는 서방 제재에도 여전히 주요 원유·천연가스 수출국이다. 원유와 천연가스 수출은 국가 재정의 핵심이다. 전쟁 이전에는 유럽이 최대 고객이었고, 지금은 중국과 인도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러시아 국민들은 휘발유를 구하지 못하고 있다. 경유도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원유 정제 시설이 잇따라 공격받고 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는 올해 들어 전략을 바꿨다. 장거리 드론으로 러시아 전역의 정유시설을 집중적으로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이달 초 우크라이나 국경에서 2500㎞ 가량 떨어진 시베리아 옴스크 정유소가 파과된 것이 대표적이다. 우크라이나의 예사롭지 않은 반격이다.

현재 러시아의 핵심 10개 정유공장들이 모두 공격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정제 능력의 최대 45%가 손실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러시아는 휘발유에 이어 경유와 항공유 수출도 금지했다. 연료 품질 규제도 일시적으로 폐지했다. 하지만 국내 공급 부족은 좀처럼 해소되지 않고 있다.

러시아 내 상당수 주유소들이 자체적으로 공급량을 제한하고 있다. 시베리아 일부 지역에서는 급유를 위해 주유소에서 무려 18시간을 기다렸다는 보도도 나왔다. 체첸에선 주유소가 아예 문을 닫았다. 연료 대란으로 농기계 가동이 어려워지면서 농민들은 애써 키운 농작물을 수확조차 하지 못할까 봐 애를 태우고 있다.

러시아 휘발유 가격은 최근 1년 새 크게 올랐고, 일부 지역에서는 평소의 몇 배에 거래되고 있다. 크림반도 일부에서는 리터당 수백 루블에 달하는 사례도 보고된다.

정유시설은 단순한 공장이 아니다. 군수물자와 민간경제를 동시에 떠받치는 핵심 인프라다. 우크라이나가 이곳을 겨냥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원유 수출은 일부 회복될 수 있지만 정유시설은 쉽게 복구되지 않는다. 특히 서방 제재로 핵심 부품 수급이 어려워 복구 기간이 길어지고 있다. 일부 정유시설은 수리하더라도 다시 공격받을 가능성이 높아 복구 자체를 미루는 사례도 있다고 한다.

명색이 세계 2위 원유 수출국인 러시아는 결국 인도에서 정제한 휘발유를 역수입하는 처지가 됐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이달 초 인도 정유사 나야라 에너지가 생산한 휘발유가 무역상을 거쳐 러시아로 반입됐다. 나야라 에너지는 러시아 국영 석유기업 로스네프트가 일부 지분을 보유한 회사다. 러시아산 원유를 인도가 싸게 사들여 휘발유로 만든 뒤 다시 러시아로 보내는 아이러니한 거래까지 등장한 것이다.

◆전쟁 승패는 주유소에서 갈린다

미국에서는 휘발유 가격이 대통령 지지율을 흔드는 대표 변수다. 러시아도 예외는 아니지만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정치 환경은 미국과는 다르다. 현재 러시아는 전시 체제다. 국가의 통제력도 그만큼 강해진 상태다. 시민들의 불만이 커지더라도 공개적인 정치적 저항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제한적이라는 분석이 많다.

그럼에도 경제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휘발유 가격 상승은 물류비를 밀어 올리고, 농업과 제조업 비용을 높이며 결국 소비자 물가 상승으로 연결된다. 군수 생산 역시 연료 없이는 지속될 수 없다. 우크라이나가 노리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전선의 병사보다 후방의 경제를 먼저 흔드는 것이다.

우크라이나의 드론은 러시아 병영보다 정유시설을 더 자주 타격하고 있다. 이는 러시아 경제의 혈관을 차단하려는 전략이다. 원유 생산량 세계 2위라는 타이틀은 정유시설이 멈추는 순간 아무 의미가 없다. 원유를 뽑아도 휘발유를 만들지 못하면 무용지물이다.

연료 부족만으로 푸틴 정권이 흔들릴 가능성은 크지 않다. 그러나 전쟁은 총탄보다 비용이 먼저 국가를 지치게 만든다. 드론 한 대가 파괴하는 것은 정유시설만이 아니다. 러시아 경제의 회복력과 국민들의 일상, 그리고 장기전의 지속 가능성까지 조금씩 갉아먹고 있다. 전쟁의 향방은 더 이상 총성이 울리는 전선에서만 결정되지 않는다. 연료를 구하려 길게 늘어선 주유소 앞 행렬도 또 하나의 전장이다. 세계 2위 산유국의 연료난, 이것이 푸틴 대통령의 굴욕이다.

박영서 논설위원(pys@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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