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패권 경쟁이 격화하는 가운데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보폭이 확대되고 있다.

CIA가 아랍에미리트(UAE)의 대표 AI 기업 G42의 중국 연계 의혹을 수년간 비밀리에 조사하는 동시에 중국과의 기술 관계를 정리하도록 유도한 것으로 드러났다.

미국이 첩보 활동과 외교, 산업정책을 결합해 우방국을 자국 AI 생태계로 편입시키려는 '기술 패권 전략'을 펼쳤다는 분석이 나온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9일(현지시간) CIA가 2023년 베테랑 요원 조니 개넌을 UAE 수도 아부다비에 비밀 파견해 G42와 중국 간 기술 협력 실태를 집중 조사했다고 보도했다. 당시 미국 정부는 G42가 중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상황에서 엔비디아 등 미국산 첨단 AI 반도체를 공급할 경우 핵심 기술이 중국으로 유출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었다.

조사 대상에는 G42 최고경영자(CEO) 펑 샤오의 이력도 포함됐다. 중국 출신인 그는 과거 UAE 사이버보안 업체 다크매터에서 AI 사업을 총괄했는데, 이 회사는 전직 미국 국가안보국(NSA) 요원들을 활용해 반체제 인사와 언론인 등을 감시한 의혹으로 미국의 수사를 받은 바 있다.

샤오가 이끌던 조직은 화웨이와 도시 감시용 AI 기술을 공동 개발하는 등 중국과 협력 관계를 구축했으며, 다크매터 해체 이후 해당 조직이 분리돼 현재의 G42로 이어졌다.

미국 대사관 직원으로 위장 활동한 개넌은 G42를 감시하는 동시에 미국 정부가 우려하는 사항을 직접 전달하며 중국과의 기술 관계를 정리하도록 설득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결과 G42는 약 1억5000만달러 규모의 화웨이 장비를 철거하고, 미국 측 요구에 따라 규정 준수 여부를 검증할 외부 감사인도 선임했다.

다만 미국 내부에서는 G42가 중국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지 않았을 수 있다는 의심도 계속 제기됐다. 일부 당국자는 G42와 중국 국영기업 간 접촉 여부를 추가 조사할 것을 요구했지만, 개넌은 일부 접촉이 있었다 하더라도 최고경영진이 아닌 하급 직원들의 독자적인 활동일 가능성이 크며 미국과의 약속을 위반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한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미 행정부에서도 UAE를 미국 AI 진영으로 끌어들여 중국을 견제해야 한다는 주장과, 중국과 가까운 국가에 첨단 AI 기술을 넘기는 것은 미국의 전략적 우위를 훼손할 수 있다는 신중론이 팽팽히 맞섰다.

이 같은 논쟁은 2024년 버지니아주 맥클린에서 열린 비공개 회동에서도 이어졌다. UAE 국가안보보좌관이자 G42의 실질적 소유주인 셰이크 타눈 빈 자예드 알나하얀, 펑 샤오 CEO, 개넌과 미국 정부 관계자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샤오는 중국 AI 기업 딥시크를 언급하며 "G42와 협력하지 않으면 중국 AI가 미국을 따라잡을 것"이라는 취지의 주장을 펼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이후 딥시크가 고성능 AI 모델을 공개하면서 미국의 위기의식은 더욱 커졌다. 조 바이든 행정부는 임기 종료 직전 UAE가 일정 조건을 충족하면 엔비디아 AI 반도체를 공급받을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 틀을 마련했고, 이는 UAE가 중국 기술 의존도를 낮추는 대가로 미국 AI 생태계에 편입되는 계기가 됐다고 WSJ는 전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이러한 기조는 한층 강화됐다.

지난 5월에는 세계 최대 규모 AI 데이터센터 구축 사업인 '스타게이트 UAE' 프로젝트에 오픈AI와 엔비디아 등 미국 빅테크가 참여하는 협약이 체결됐다. 미 상무부도 이달 10일 UAE에 대한 AI 반도체 수출 규제를 대폭 완화했다. 이에 따라 G42는 앞으로 최소 9개월 동안 엔비디아 등 미국 기업으로부터 첨단 AI 반도체를 사실상 자유롭게 확보할 수 있게 됐다.

한편 UAE 측이 트럼프 대통령 취임 직전 트럼프 일가가 설립한 가상자산 기업에 5억달러 투자를 약속한 것을 두고 이해충돌 논란도 제기됐지만, 백악관은 관련 의혹을 부인했다.

WSJ는 이번 사례가 AI 시대 패권 경쟁이 첩보 활동과 외교, 산업 정책, 기업 투자가 결합한 새로운 양상으로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미국은 중국과의 연결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을 AI 반도체 공급의 전제 조건으로 내세웠고, CIA는 그 과정에서 미국의 기술 전략을 지원하는 핵심 역할까지 수행했다. 이는 AI 패권 경쟁이 정보기관과 빅테크, 외교 당국이 함께 움직이는 국가 차원의 총력전으로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분석이다.

이규화 대기자 david@dt.co.kr

마코 루비오(왼쪽) 미 국무장관과 셰이크 타눈 UAE 국가안보보좌관. AP 연합뉴스 자료사진
마코 루비오(왼쪽) 미 국무장관과 셰이크 타눈 UAE 국가안보보좌관. AP 연합뉴스 자료사진


[저작권자 ⓒ디지털타임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규화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