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글로벌 원유 공급망이 목을 졸린 가운데, 유일한 숨통이었던 ‘홍해 우회로’마저 끊길 위기에 처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예멘의 친이란 무장세력 후티 반군 간의 무력 충돌이 재개되면서, 중동의 양대 원유 수송로가 동시에 마비되는 최악의 ‘이중 봉쇄’ 시나리오가 현실화하고 있다. 두 해협이 장기간 제 기능을 잃을 경우 전 세계적인 경제 침체가 불가피할 것이라는 경고가 쏟아지고 있다.

17일(현지시간)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사우디는 미국과 이란의 전쟁 여파로 호르무즈 해협 통행이 막히자 홍해 항로를 주요 수출 우회로로 활용해 왔다. 동부 유전에서 생산된 원유를 동서 송유관을 통해 서부 연안 얀부항으로 보낸 뒤, 유조선에 실어 홍해 입구의 바브엘만데브 해협을 거쳐 수출하는 방식이다.

사우디는 이 우회로 덕분에 전체 원유 수출량을 하루 460만배럴 수준으로 방어할 수 있었다. 전쟁 전(하루 730만배럴)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충격을 크게 완화한 셈이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하던 후티 반군과의 휴전 체제가 최근 크게 흔들리면서 홍해 항로의 안전마저 담보할 수 없게 됐다.

2022년부터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사우디와 후티 반군 간의 휴전은 최근 양측이 공습을 주고받으며 사실상 파기 수순에 들어갔다. 지난 13일 사우디와 예멘 정부군 측이 후티가 장악한 예멘 수도 사나의 국제공항을 폭격하자, 후티는 사우디 남부 아브하 국제공항에 탄도 미사일과 자폭 드론을 발사하며 즉각 보복에 나섰다.

갈등이 격화되면서 후티 반군이 홍해를 지나는 선박에 대한 공격을 재개하거나 사우디의 핵심 항만 및 석유 시설을 직접 겨냥할 가능성이 농후해졌다.

시장에서는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에 이어 후티의 바브엘만데브 해협 위협이 겹치는 상황을 최악의 시나리오로 꼽고 있다. 현재는 각국이 상업용 재고와 비축유를 풀며 버티고 있으나, 사태가 장기화하면 한계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영국의 경제분석기관 캐피털이코노믹스는 중동의 두 핵심 수송로가 장기간 차질을 빚거나 사우디의 주요 시설이 파괴될 경우, 세계 경제가 심각한 침체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카야 칼라스 유럽연합(EU) 외교안보 고위대표 역시 “육지에서의 분쟁이 해상의 불안정으로 빠르게 번질 수 있다는 강력한 경고”라며 우려를 표했다.

다만 전문가들은 후티 반군이 즉각적인 전면전에 돌입하기보다는, 긴장감을 점진적으로 끌어올리며 사우디를 압박할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에이프릴 롱리 앨리 전 유엔 예멘 특사실 선임 정치고문은 “후티가 판을 키워 더 많은 것을 얻어낼 기회를 잡으려 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홍해 위기를 지렛대 삼아 사나 공항 운항 재개와 물자 반입 확대 등 향후 협상 테이블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려는 고도의 전술이라는 해석이다.

홍해의 입구 바브엘만데브 해협. [로이터=연합뉴스]
홍해의 입구 바브엘만데브 해협. [로이터=연합뉴스]
이규화 대기자(david@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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