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그룹 몰락 이후 주인이 바뀐 미술관에 30여년간 남겨져 있던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걸작이 원래 주인인 고(故) 김우중 회장의 부인 정희자 씨의 품으로 돌아가게 됐다.
비록 반환을 청구한 188점 중 단 3점만 소유권을 인정받은 ‘절반의 승리’지만, 불의의 사고로 잃은 아들을 기리기 위해 세웠던 미술관의 핵심 상징물들을 되찾았다는 점에서 이목이 쏠리고 있다.
18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4부는 정씨가 우양산업개발(옛 대우개발)을 상대로 제기한 동산인도청구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앞서 정씨는 현재 우양미술관이 점유하고 있는 미술품 188점을 돌려달라며 지난해 7월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 중 백남준의 작품 2점과 독일 출신 현대미술 거장 지그마르 폴케의 작품 1점 등 총 3점에 대해서만 정 씨의 소유권을 인정하고 반환을 명령했다.
정씨 측은 1991년 무렵 남편인 고 김우중 회장이 지배하던 우양산업개발 산하 경주 힐튼호텔과 미술관에 개인 소유의 미술품을 전시 및 보관하게 했으나, 이후 경영권이 넘어가는 과정에서 작품을 돌려받지 못했다고 주장해 왔다.
재판부는 당시 미술품을 판매한 화랑 대표와 정 씨의 옛 비서실 직원, 미술관 큐레이터의 진술을 종합해 해당 3점은 정씨가 사비로 구매한 것이 맞다고 판단했다. 또 2014년 정씨가 우양산업개발 측에 “개인 자금으로 산 미술품 반환을 이행해달라”는 내용의 공문을 보낸 사실도 소유권을 인정하는 주요 근거로 삼았다.
반면, 재판부는 나머지 185점의 미술품에 대해서는 “정씨가 실제로 구매했다고 증명할 만한 객관적인 자료가 없다”며 기각했다.
재판 과정에서 정 씨는 과거 미술관 관장으로 재직할 당시 작품의 소유관계를 명시하는 소장품 자료 카드를 직접 작성했으며, 자신의 소유물에는 알파벳 ‘M’ 코드를 부여해 관리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카드를 직접 작성했던 큐레이터가 증인으로 출석해 “당시 소유자를 정확히 알 수 없는 경우에도 임의로 ‘M’ 코드를 기재했고, 추후 실제 소유자가 나타나 이의를 제기하면 코드를 수정하는 식으로 업무를 처리했다”고 진술하면서 상황이 반전됐다.
재판부는 이러한 증언을 바탕으로 자료 카드에 적힌 ‘M’ 코드만으로는 해당 작품들이 정씨 소유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1심 판결에 불복한 우양산업개발 측은 즉각 항소했다.
이번 소유권 분쟁의 이면에는 대우그룹의 굴곡진 역사가 있다. 소송의 배경이 된 우양미술관의 원래 이름은 ‘아트선재미술관’이다. 정씨가 미국 유학 도중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장남 김선재 씨 넋을 기리기 위해 1991년 경주에 설립한 뜻깊은 공간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 여파로 대우그룹이 공중분해 되면서 미술관의 운명도 바뀌었다. 미술관이 경주힐튼호텔과 함께 우양산업개발에 매각되며 주인이 바뀌었고, 이름 역시 우양미술관으로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번 판결로 정씨가 되찾게 된 백남준의 작품은 ‘나의 파우스트’ 연작 13점 중 ‘경제학’과 ‘영혼성’이다.
백남준이 1989년부터 1991년까지 미국 신시내티에 머물며 제작한 이 연작은 괴테의 문학 ‘파우스트’에서 영감을 받아 경제, 환경, 예술, 종교 등 인류 문명을 지탱하는 13가지 요소를 비디오 아트로 구현한 대작이다.
‘나의 파우스트-경제학’은 3.1m 높이의 거대한 종교 제단 모양으로 브라운관 텔레비전을 쌓아 올린 뒤, 세계 각국의 화폐와 동전으로 화려하게 장식했다. 고도화된 현대 사회에서 기술과 자본이 맺는 관계성,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가치에 미치는 영향을 날카롭게 꼬집은 작품이다.
‘나의 파우스트-영혼성’도 ‘경제학’과 마찬가지로 텔레비전을 제단 형태로 구성하고, 그 위에 다채로운 종교적 상징물과 정신문화를 뜻하는 오브제, 영상을 결합했다. 물질문명의 홍수 속에서 잃어버린 인간 본연의 정신적 가치를 환기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두 걸작은 오랜 기간 고장 난 상태로 수장고에 잠들어 있었으나, 지난해 우양미술관 재개관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경주 개최를 기념해 대대적으로 복원되며 대중에 다시 공개됐다.
임주희 기자(ju2@dt.co.kr)실시간 주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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