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한 중 유일한 일반기업 방문

엔진·장비·교육까지 전방위 협력

정 청업주 만남 뒤 46년 만 인연

HD현대중공업 조선소 야드 전경. HD현대중공업
HD현대중공업 조선소 야드 전경. HD현대중공업

방한한 영국 찰스 3세 국왕의 동생 앤 공주가 정기선 HD현대 그룹 회장과 만났다.

앤 공주는 1983년 당시 런던에서 우리나라의 1988 서울 올림픽 유치 활동 당시 고(故) 정주영 창업주와 만난 적이 있는데, 43년이 지난 14일 정 창업주의 손주와 다시 만나 특별한 인연을 이어가게 됐다.

사실 전 세계의 러브콜을 받고 있는 K-조선의 현재 위상은 영국의 도움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지도 모른다. 영국은 정 창업주가 아무런 기반도 없던 1970년 조선 사업 진출을 모색할 당시 결정적인 도움을 줬고, 이는 한국이 조선 강국이 되는 토대가 됐다.

56년이 지난 지금, 한국은 이제 '은인'이자 '스승' 격인 영국과 함께 조선에서 해양방산까지 동맹을 강화할 방안을 논의했다.

HD현대중공업은 이날 앤 공주와 남편인 티머시 로런스 경, 콜린 크룩스 주한영국대사 등이 울산 본사를 방문했다고 밝혔다.

정 회장과 이상균 HD현대중공업 부회장, 주원호 사장 등 경영진은 앤 공주 일행을 맞아 조선·해양 기술 경쟁력을 소개하고 양국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이번 방문은 영국 정부가 자국 조선업과 해양산업 재건을 추진하는 가운데 이뤄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지난 13일부터 사흘간 이어진 앤 공주의 방한 일정 가운데 일반 기업 방문은 HD현대중공업이 유일했다.

앤 공주는 세계 최대 규모의 조선소인 울산 야드에서 상선과 함정 건조 현장을 둘러보고 엔진 공장을 방문했다. HD현대중공업은 선박 건조 기술뿐 아니라 영국 기업들과 진행 중인 함정 분야 협력 현황도 소개했다.

영국 방산 기업인 롤스로이스는 2012년 한국 해군 호위함 사업을 계기로 HD현대중공업과 협력해 오고 있다.

롤스로이스가 핵심 추진장비인 MT30 가스터빈을 공급하면 HD현대중공업이 이를 함정 추진 패키지로 통합하는 방식이다. 이 기술은 우리 해군 차세대 호위함에 적용되고 있다.

영국의 해양 안전장비 기업 뷰포트와의 협력도 이어지고 있다. 뷰포트는 잠수함용 구명장비를 시작으로 HD현대중공업과 협력해 왔으며, 현재 필리핀 원해경비함 등 HD현대중공업이 건조하는 함정에도 관련 장비를 공급하고 있다.

정 회장은 "영국은 단순한 협력 국가가 아닌, HD현대의 시작을 함께한 특별한 파트너"라며 "HD현대가 가진 최고의 기술력과 선박 건조 능력을 바탕으로 영국 조선·해양 산업 발전에 힘을 보탤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방문이 주목받는 이유는 HD현대와 영국의 인연이 한국 조선산업의 태동기까지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다. 1970년 정 창업주는 조선소 건립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세계 각국을 돌며 차관 유치에 나섰다.

당시 정 창업주는 영국 조선기술회사 A&P 애플도어의 찰스 롱바톰 회장을 만나 한국의 조선 잠재력을 설명했고, 롱바톰 회장은 이를 높이 평가해 영국 버클레이은행에 추천서를 써줬다.

이를 계기로 현대는 조선소 건설에 필요한 차관을 확보했고, 울산 조선소 건립이라는 한국 조선산업의 출발점이 마련됐다.

이후 영국 정부는 한국 조선산업 기반 조성에 힘을 보탰다.

양국 정부는 1971년 울산공과대(현 울산대) 설립 협정을 체결하고 영국이 전문가 파견과 교육과정 개발, 실험 기자재 지원 등에 나섰다.

당초 10만 파운드 규모였던 지원도 32만 파운드까지 확대했다. 당시 도입된 영국식 산학협동교육은 국내 최초로 대학 교육과 산업현장을 연계한 교육 시스템으로 자리 잡으며 산업 인재 양성의 기반이 됐다.

영국 왕실과 현대가의 인연도 수십 년간 이어져 왔다. 정 창업주는 한국과 영국 간 무역 증진에 기여한 공로로 1977년 영국 왕실이 수여하는 대영제국훈장(CBE)을 받았다.

이후 1988년 서울올림픽 유치 과정에서는 당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이었던 앤 공주와 정 창업주가 여러 공식·비공식 행사에서 만나 교류한 기록도 남아 있다.

왕실의 울산 방문도 꾸준히 이어졌다. 1992년에는 당시 찰스 왕세자(현 찰스 3세 국왕)가 HD현대중공업을 찾았고, 2008년에는 앤드루 왕자가 영국 정부 무역투자특별대표 자격으로 방문해 선박 건조 현장을 둘러봤다.

이번 앤 공주의 방문은 영국 왕실의 세 번째 HD현대 사업장 방문이다.

업계에서는 최근 양국의 협력이 상선을 넘어 방산과 함정 분야로 확대되는 시점에 이뤄졌다는 점에도 의미를 부여했다. 영국은 조선업 경쟁력 회복과 해군력 강화를 국가 전략으로 추진하고 있으며, HD현대중공업은 함정 수출과 글로벌 방산 협력을 확대하고 있다.

왕실의 이번 방문은 양국이 반세기 넘게 이어온 조선 협력이 미래 함정·방산 분야로까지 확장될 가능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평가다.

임주희 기자 ju2@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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