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성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연구위원
“나무를 베는 데 10시간이 주어진다면, 8시간은 도끼를 가는 데 써야 한다.” 실행보다 준비가, 노력보다 방향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우리나라 2026년 국가 R&D 예산은 35조5000억원으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GDP 대비 연구개발(R&D 투자 비중은 약 4.9%로 이스라엘과 함께 세계 최상위권이다.
“연구비가 부족하다”는 걱정은 이제 옛말이 됐다. 문제는 도끼날이다. 이 막대한 예산이 과연 올바른 방향을 향하고 있는가, 부처 간 중복투자는 없는가, 미래 기술 변화에 맞게 투자 포트폴리오가 설계되고 있는가.
전략 기획 역량의 부재는 이미 비용으로 나타난 바 있다. 알파고 충격 이후에야 인공지능(AI)이 국가 전략기술로 지정됐고, 양자컴퓨팅 국가전략은 주요국보다 한참 뒤처져 수립됐다. 선점의 기회는 짧다. 전략이 늦으면 예산이 아무리 커도 따라잡을 수 없다.
선진국들은 이 문제를 조직으로 풀고 있다. 미국 백악관 과학기술정책실(OSTP)은 소규모지만 연방 R&D 예산의 우선순위 권고안을 관리예산국에 직접 제출하는 실질적 권한을 갖는다. 트럼프 행정부에서 이 조직이 대폭 축소되자 과학계가 즉각 우려를 표명한 것은, 독립적 컨트롤타워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일본은 총리 직속 종합과학기술혁신회의(CSTI)가 부처를 초월한 예산 조정 권한을 행사하며, 프로그램 디렉터(PD)에게 연구기획부터 집행 책임까지 맡긴다. 유럽연합(EU)의 호라이즌 유럽(Horizon Europe)은 정책 설계와 자금 집행을 분리해 기획 조직이 전략에만 집중한다. 공통점은 하나다. 예산의 크기보다 방향을 설계하는 역량에 먼저 투자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현실은 다르다.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는 R&D 예산 배분 조정의 심의 기능을 담당하지만, 실무 지원단은 부처 파견 인력 중심으로 운영돼 장기적 전문성 축적과 정책 연속성이 취약하다.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은 분석·지원 역할에 머물 뿐 실질적 예산 조정 권한이 없다.
올해 초 정부조직법 개정으로 과기정통부는 부총리 부처가 됐다. 그러나 배분·조정안을 마련하는 것과 예산을 최종 편성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후자의 권한은 여전히 기획예산처에 있다. 위상이 높아졌다고 권한까지 강화된 것은 아니다.세계 최상위권 R&D 투자국이지만, 전략을 결정하는 정책 역량은 투자 규모에 못 미친다.
처방은 세 가지다. 첫째, R&D 전략 컨트롤타워의 전문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 단, 그 역할은 개별 연구자의 주제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분야에 얼마나 투자할지 포트폴리오를 설계하는 것으로 한정되어야 한다. 기초연구 비중 보장도 그 전략의 일부다. 또한 그 인력은 순환 파견 행정이 중심이 아니라, 현장 과학자가 실질적 의사결정권을 갖는 구조여야 한다. 정권이 바뀌어도 전략의 일관성이 유지되는 체계가 필요하다.
둘째, 기술예측·투자분석·성과평가 등 정책 기획 기능에 대한 예산 투자를 늘려야 한다. 현재 이 기능에 투입되는 예산은 전체 R&D 예산에 비해 극히 미미한 수준이다. 전략을 설계하는 데 쓰는 돈이 나머지 예산의 효과를 결정한다는 점에서, 이는 비용이 아니라 투자다.
셋째, 정부가 최근 도입하기 시작한 AI 기반 중복투자 분석을 글로벌 기술경쟁 모니터링과 투자 포트폴리오 최적화 등으로 확장해야 한다. 연구개발에 AI를 활용하는 것만큼, 연구개발 정책을 설계하는 과정에도 AI를 적극 활용해야 할 때다.
기술패권 경쟁의 승패는 연구비의 크기가 아니라 전략의 선명함에서 갈린다. 기술패권의 판도는 지금 이 순간에도 재편되고 있다. 전략은 위기가 닥친 뒤가 아니라, 위기가 오기 전에 완성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갈아야 할 도끼는 새로운 기술만이 아니다. 35조원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과학기술 전략이라는 도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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