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제작 장편영화 ‘미스얼라인드’ 주연으로 캐스팅

재조합 결과인가 예술 형태인가… 인간성 논쟁 재점화

AI는 연기를 확장하지만, 인간은 ‘인간’ 자체를 연기

인간 배우 존재 가치는 오히려 더 두드러질 가능성도

AI 배우 틸리 노우드. 틸리 노우드 소셜미디어 계정 캡처. 연합뉴스
AI 배우 틸리 노우드. 틸리 노우드 소셜미디어 계정 캡처. 연합뉴스

AI 배우 ‘틸리 노우드’

인공지능(AI)이 바둑을 두고, 소설을 쓰고, 음악을 만드는 시대를 넘어 이제는 영화 속 주연 배우 자리까지 넘보고 있다.

지난해 10월 할리우드를 뜨겁게 달군 AI 배우 ‘틸리 노우드’(Tilly Norwood)가 실제 장편 영화의 주인공으로 캐스팅되면서 AI가 인간 배우의 영역까지 침투하는 시대가 현실이 됐다.

AI 시대라는 이정표 앞에서 ‘배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다시 던져졌다.

미국 연예 전문매체 데드라인에 따르면 AI 배우 틸리 노우드는 영국 제작사 파티클6가 제작하는 코미디 영화 ‘미스얼라인드’(Misaligned·어긋남)에서 주연을 맡는다.

영화는 육체도, 유년기도 없는 AI가 악성 봇을 만나 욕망과 충동을 갖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고 한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의 내용뿐 아니라 영화 자체가 현실의 논쟁을 그대로 옮겨놓는다는 것이다.

인간이 만든 AI가 인간을 연기하는 작품을, 인간 관객이 바라보게 되는 셈이다.

틸리 노우드는 지난해 스위스 취리히 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되자마자 거센 논란을 불러왔다.

미국 배우·방송인 노동조합(SAG-AFTRA)은 “틸리는 배우가 아니다”라며 “수많은 배우들의 연기를 학습한 프로그램이 인간 예술가의 생계를 위협한다”고 강하게 반발했다. AI가 인간 배우들의 연기를 데이터로 학습해 만들어졌다면 이는 창작이 아니라 ‘축적된 인간의 표현을 재조합한 결과’라는 문제 제기였다.

반면 제작자인 엘린 판데르 펠덴은 전혀 다른 관점을 주장했다.

그는 “우리는 여전히 스칼릿 조핸슨이나 라이언 레이놀즈를 보고 싶어 할 것”이라며 AI 배우 역시 애니메이션 캐릭터처럼 하나의 새로운 창작 도구이자 예술 형태라고 주장했다.

AI는 인간을 지우기 위한 기술이 아니라 상상력을 확장하는 새로운 표현 방식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펠덴의 주장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기술적 발전은 찬사받을 만하지만, AI 배우가 과연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배우는 단지 대사를 정확히 전달하고 연기하는 존재가 아니다. 배우가 연기하는 캐릭터의 얼굴에는 살아온 시간과 경험이 배어 있고, 실패와 상실, 사랑과 후회가 감정의 밀도를 만든다. 같은 눈물이라도 실제 삶에서 비롯된 감정과 알고리즘이 계산한 표정은 관객에게 다른 울림을 준다.

인간 배우는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재료 삼아 타인의 삶을 살아낸다.

AI는 이러한 감정을 매우 정교하게 모방할 수 있다. 수백만 편의 영화와 수많은 배우들의 표정, 목소리, 호흡을 분석하면 인간이 감동하는 패턴을 재현하는 것은 점점 쉬워질 것이다. 몇 년 뒤에는 AI 배우가 조핸슨보다 더 완벽한 연기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완벽함이 곧 진정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술은 출력된 결과가 다가 아니다. 과정에도 의미를 두는 영역이다. 인간은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들으면서 그가 흘린 땀과 연습의 시간을 함께 떠올리고, 배우의 눈물을 보면서 그 사람이 살아온 시간을 무의식적으로 읽는다.

감동은 잘 짜여진 기계적, 알고리즘적 장면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장면 뒤에 존재하는 ‘인간의 삶’을 연상하며 작동한다.

그렇다고 AI 배우를 무조건 배척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영화는 발전해왔다. AI 배우 역시 새로운 장르를 열 수 있다. 인간이 구현하기 어려운 상상 속 존재를 현실감 있게 표현하거나, 인간 배우와 AI 배우가 함께 만들어내는 새로운 서사도 가능하다.

영화 ‘아바타’처럼 노우드가 연기하는 ‘미스얼라인드’도 결국 소프트웨어가 만드는 영화다. 이 측면에서 보면 영화배우 조합이 AI 영화를 반대하는 것은 차별적이다. 애니메이션 영화는 되고 알고리즘 영화는 안 된다는 건 어폐가 있다.

틸리 노우드 출연 영화는 미래 영화산업에서 AI 인물이 얼마만큼 인간을 대신해, 또는 인간과 함께 활동 범위를 넓힐 수 있는지 알아보는 지표가 될 것으로 보인다.

AI가 배우의 자리를 차지할수록 인간 배우의 존재 가치는 오히려 더 두드러질 가능성도 있다. AI 배우가 많아질수록 ‘진성 인간’을 더 찾을 것이기 때문이다. 휴머니티(인간성)가 본령인 예술에서 그것이 증발된다면, 예술이라고 할 수 없다.

이규화 대기자 david@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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