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균 편집국장
#지난 2018년 2월 29일이다. 주한 영국대사를 인터뷰했다. 문재인 정부의 ‘탈(脫)원전’이 한창 이슈로 떠오른 때였다. 대뜸 촌평을 요청했다. 머뭇거리던 영국 대사는 ‘비보도’를 전제 조건으로 “바보 같은 짓”이라고 잘라 말했다. 외교 관계를 고려해 공식적으로는 말을 아꼈지만 속내를 드러낸 것이다. 그는 영국이 원전 폐쇄와 해체에 경험이 풍부한 만큼 참여를 희망한다는 말을 꼭 써 달라고 당부했다.
#2005년 영국 연수시절, 웨일스 일대를 돌아본 적이 있다. 산 속에 성곽 형태의 시설이 눈에 들어왔다. 1965년 전력 생산을 시작한 트라우스비니드 원전이었다. 영국에서 내륙에 지어진 유일한 상업용 원전이었다. 주변 경관과 잘 어울려 주민들에게 환영받는 시설로 자리 잡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해안가 원전에 익숙했던 터라 내륙 원전 자체가 신기하게 여겨졌다.
이재명 정부가 추진 중인 3대 메가프로젝트, 그 중에서도 ‘서남권 반도체’를 두고 논란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 정치적 고려에 따른 결정, 혹은 기업 팔목 비틀기라는 입지에 대한 비판은 일단 논외로 하자. 어쨌든 삼성전자와 SK그룹의 최고 의사 결정권자인 이재용·최태원 회장이 국민 앞에 공개적으로 사업 추진을 약속했다. 손바닥처럼 쉽게 뒤집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서남권 반도체는 ‘800조원+알파’라는 막대한 투자금이 들어간다. 구상을 넘어 실행 단계로 안착하기 위해서는 냉철한 사전 점검이 필요하다. 전제 조건으로 크게 ‘인물전쩐’ 4가지가 거론된다. 사람과 용수, 전력, 그리고 투자 재원이다. 전문가들은 이 중 전력과 물의 안정적 공급을 결정적인 선결 과제로 꼽고 있다.
반도체는 웨이퍼 세정에 필수적인 공업용수를 확보해야 한다. 사용량이 많아 ‘물먹는 하마’격이다. 정부는 서남권 반도체 팹 4기를 24시간 돌리는 데 하루 65만톤의 물이 필요한 것으로 추산한다. 이를 위해 동북댐과 주암댐·장흥댐·보성강댐 등 기존 댐에서 용수를 ‘영끌’하겠다는 구상이다. 하지만 반도체 공정에 필수적인 ‘안정적이고 균일한 수질 보장’을 위해서는 신규 댐 건설 등 파격적 보완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전력은 더 큰 의문 부호가 붙는다. 반도체 팹은 ‘에너지 대식가’다. 양과 질(안정적 공급) 모두 중요하다. 전기가 한순간이라도 끊기면 치명적 피해를 입는다. 1999년 대만의 실리콘 밸리인 신주과학단지에서 강진으로 대규모 정전 사태가 발생했다. 반도체 공장 가동이 전면 중단되면서 메모리 반도체값이 치솟았다. 이 사건은 메모리 반도체에서 삼성전자가 대만과의 초격차를 이뤄내는 계기 중 하나로 작용했다.
정부는 호남권의 풍부한 태양광·풍력 등을 경쟁력으로 내세우고 있다. 이들 신재생에너지는 기상조건의 영향을 받는다. 첨단 팹의 미세공정을 안정적으로 돌리려면 원전 같은 기저에너지 시설이나 대규모 에너지저장장치(ESS) 구축이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주장이다. 정부도 이같은 약점을 감안해 추가 원전 설립 가능성을 관련 장관들의 입을 통해 전하고 있다.
지난 달 29일 3대 메가 프로젝트 국민 보고회. 이 대통령은 이재용·최태원 회장에게 90도로 허리 숙여 감사의 뜻을 전했다. 대한민국 정치·기업사에서 전례없는 명장면이었다. 지역 불균형을 해소해야 한다는 대통령의 절박감이 메가 투자를 결정해 준 두 회장에게 고개를 숙이게 한 것이다. 이 대통령은 당초 큰 절을 생각했는데 주변에서 만류했다고 전해진다. ‘먹사니즘’을 강조해온 이 대통령이기에 이같은 파격이 가능했다는 평가다.
서남권 반도체는 그 자체가 모험이다. 오는 7~11일 튀르키에·몽골 등 해외 순방에 나서는 이 대통령은 6일에도 서남권 반도체 클러스터 점검회의를 직접 주재한다. 보다 빈틈없이 챙기고 ‘초(超) 속도전’을 통해 굳히기에 들어가겠다는 의도로 읽힌다.
이번 투자는 삼성과 SK에겐 명운이 달린 프로젝트다. 두 회사들은 안정적인 전력과 용수 공급을 위한 정부의 발상 전환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 그리고 ‘확인 도장’까지 바라고 있다. 다시 한번 이 대통령의 실용주의적 결단, 그리고 이어지는 파격적인 추진력을 기대한다. 그렇게 되면 ‘90도 인사’가 ‘큰 절’의 몇 배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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