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웅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원장
인류는 지금 인공지능(AI)이 인간의 보편적 지성을 뛰어넘는 일반인공지능(AGI) 시대라는 거대한 전환점 앞에 서 있다. 인류는 처음으로 자신이 만들었지만 자신보다 뛰어난 존재와 살아가야하는 세상으로 들어가고 있다. 초거대 AI와 첨단 반도체 기술은 이제 산업 경쟁력을 넘어 국가의 안보와 미래를 좌우하는 핵심 자산이 되었으며, 세계는 치열한 기술 패권 경쟁 속으로 빠르게 진입하고 있다.
대한민국 과학기술의 최전선을 책임지는 정부출연연구기관의 원장으로서 필자는 이 기술이 결코 목적 그 자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초거대 AI도, 고성능 반도체도, 초연결 6G 네트워크도 결국은 사람을 위한 기술이어야 한다. 아무리 혁신적인 기술이라도 국민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단지 차가운 기술에 머물 뿐이다. 과학기술의 궁극적인 목적은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고, 모두가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따뜻한 사회를 만드는 데 있다. 하지만 승자가 독식하게 되는 기술 패권 경쟁 속에 거대 빅테크를 앞세운 미중 AI 전쟁터에서 우리는 우리의 생존에 위협을 받고 있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은 지난 반세기 동안 대한민국 과학기술의 불모지에서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어 왔다. 백만 가구의 전화 적체를 해소하며 ‘1가구 1전화’ 시대를 연 전전자교환기(TDX), K-반도체 산업의 토대를 마련한 DRAM 반도체 개발, 그리고 세계 최초 디지털 이동통신 상용화를 이룬 CDMA는 대한민국 ICT 역사의 상징이자 정보통신 강국으로 도약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올해는 ETRI 창립 5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이다. 대한민국 통신 자립의 기반을 마련한 TDX 개발 40주년과 CDMA 상용화 30주년이 함께하는 역사적인 시점이기도 하다. 지난 반세기의 성과는 대한민국 ICT의 자부심이자, 앞으로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는 든든한 토대가 되고 있다.
ETRI는 이러한 성과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미래를 향한 도전을 시작했다. 지난 4월 창립 50주년 기념식에서는 대한민국이 글로벌 AI 3대 강국(G3)으로 도약하기 위한 ‘AI 주권 수호 디지털 결의식’을 개최했다. 이는 단순히 AI와 6G 기술 경쟁에서 앞서가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글로벌 빅테크 중심의 경쟁 속에서도 우리 국민의 데이터와 디지털 주권을 지키고 대한민국의 미래 경쟁력을 스스로 확보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제 우리는 지난 50년의 성공을 넘어 AGI 시대라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앞으로의 50년 동안 ETRI가 만들어 갈 미래는 AI와 디지털 전환(DX)을 기반으로 국민 모두가 함께 성장하고 더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안전한 AGI’ 개발에 역량을 집중할 것이다. 또한 대한민국 산업의 혁신을 이끌 핵심 기술인 피지컬 AI를 고도화하고, 국가 공공 인프라와 산업 현장, 국방·치안 분야에 AI 기반 디지털 전환(ADX)을 적극 확산해 나가고자 한다. 이를 통해 산업 현장은 더욱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변화하고, 공공 서비스는 더욱 정교해질 것이다. 국민이 체감하는 삶의 질 또한 한층 높아지길 기대한다.
이와 함께 공간의 제약을 극복하는 6G·위성통신과 현실과 가상을 연결하는 입체공간 미디어 등 미래 전략기술 개발에도 역량을 집중할 것이다. 이러한 기술들은 대한민국이 글로벌 기술 패권 경쟁에서 주도권을 확보하고 국가 경쟁력을 높이는 핵심 기반이 될 것이다.
새롭게 원장이라는 막중한 책무를 맡으며 필자는 무거운 책임감과 함께 사명감을 느끼고 있다. ETRI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분명하다. 국민에게 신뢰받고 사랑받는 연구기관이 되는 것이다. 국민이 일상에서 어려움을 겪거나 국가적 난제에 직면했을 때 가장 먼저 현장에서 과학기술로 해결책을 제시하는 연구기관, 국민 곁에서 함께 하는 연구기관이 되고자 한다.
반세기 전 기술 불모지에서 대한민국 통신의 기적을 만들어 냈던 도전 정신으로 이제는 국민의 행복을 위한 새로운 50년을 시작하려 한다. 기술을 움직이는 힘은 혁신이지만, 기술이 존재하는 이유는 언제나 우리 국민이다. 대한민국이 함께 살아가는 따듯한 사회가 되도록 ETRI는 앞으로도 과학기술 개발에 앞장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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