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윤종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 원장
우리 산업의 미래를 논할 때 가장 뜨거운 화두는 ‘대체불가 초격차 산업국가’다. 글로벌 전선에서 활약하는 초일류 대기업의 역할이 절대적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현장에서 산업 생태계를 깊숙이 들여다보면, 보다 현실적인 질문을 던지게 된다. 과연 몇 개의 글로벌 대기업만으로 누구도 흔들 수 없는 ‘대체불가 국가’ 반열에 오를 수 있을까.
답은 명확하다. ‘그 나라의 소재와 장비가 없으면 글로벌 산업이 멈춘다’는 확신을 주어야 진정한 대체불가 국가다. 이는 완제품 세계 1등 기업만으로는 완성되지 않는다. 공급망의 병목 지점(Choke Point)을 장악한 강소기업들이 두텁게 포진해야 한다. 대기업이 글로벌 시장의 정점에 서 있다면, 강소기업은 가치사슬 전체를 지탱하는 단단한 지반이다. 이 두 축이 맞물려 완성돼야 비로소 대체불가 초격차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독일과 일본의 경험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독일의 견고한 맷집은 완성차 대기업과 함께 기계, 화학 분야에서 세계 시장을 지배하는 중견기업 ‘미텔슈탄트’(Mittelstand)의 결합에서 나온다. 일본 역시 공급망의 핵심 목줄을 틀어쥔 소부장 강소기업들의 압도적인 기술력 덕분에 글로벌 가치사슬에서 막강한 패권을 유지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이러한 사례가 적지 않다. 동진쎄미켐은 국내 최초로 반도체용 포토레지스트를 개발해 3D 낸드용 제품에서 세계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파크시스템스는 원자현미경 기반 반도체 계측장비 시장에서 세계 1위의 지위를 다졌다. 글로벌 뷰티 브랜드의 제조사인 한국콜마와 체성분 분석기의 글로벌 표준이 된 인바디는 고유 영역에서 대체 불가능한 기술 영토를 확보했다.
문제는 이 허리가 여전히 얇다는 데 있다. 대기업 종속 구조에 따른 성장 정체, 그리고 규모가 커질수록 규제만 늘어나는 데서 비롯된 성장 회피 성향은 우리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다. 여기에 AI 전환 지체와 글로벌 환경 규제 장벽은 강소·중견기업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우리 산업의 허리를 더 단단하게 구축하기 위해 세 가지 실행 방향을 제안한다.
첫째, AI 전환(AX)을 통한 독점적 초격차 기술의 완성이다. 강소기업의 경쟁력은 현장 숙련공들의 공정 노하우라는 ‘암묵지’에서 나온다. 이 고유 자산을 디지털 데이터로 자산화하고 AI와 결합할 때 모방 불가능한 진입장벽이 세워진다. 업종별 공통 제조 데이터를 축적하고 맞춤형 AI 모델을 공동 개발하는 ‘제조 AI 전환(M.AX) 얼라이언스’ 프로젝트를 가속화해야 하는 이유다. 이를 통해 우리 강소기업들이 단순 제조사를 넘어 ‘지능형 기술 독점체’로 진화할 수 있다.
둘째, 지역 앵커기업의 히든 챔피언화다. 강소·중견기업은 지역 경제를 지탱하는 방파제다. 이제는 ‘5극 3특’ 초광역 메가경제권 전략에 발맞춰, 우수 중견·강소기업들을 지역 공급망의 핵심 허브로 격상시켜야 한다. 단순히 지역 내 고용 유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원천 기술을 고도화해 글로벌 시장을 흔들 수 있는 전방위적 ‘앵커’(Anchor)로 키워야 한다. 이를 위해 지역 앵커기업에 연구·개발(R&D)과 인프라 투자를 패키지로 과감하게 집중 지원해야 한다.
셋째, 스케일업을 가로막는 제도적 장벽의 혁파다. 기업이 성장할수록 혜택은 끊기고 규제만 늘어나는 구조는 기업들을 ‘피터팬 증후군’에 가두어 둔다. 원천 기술 개발을 위한 장기적인 지원 체계를 구축하고, 과감한 세제 혜택과 스케일업 전용 금융·투자 생태계를 범부처 차원에서 전폭적으로 뒷받침해야 한다. 기업이 눈치 보지 않고 성장에만 매진할 수 있는 환경을 열어주어야 한다.
이러한 현장의 갈증을 해소하고 우리 산업의 핵심 알짜 동력을 발굴·육성하는 대표적인 사업이 바로 ‘월드 클래스 플러스’(WC+)다. 그동안 참여 중소기업 세 곳 중 한 곳을 중견기업으로 도약시키는 든든한 사다리 역할을 해왔다. 최근 비수도권 R&D 지원을 최대 50억원으로 전격 확대하고, 매출 1조원까지 지원 자격을 장기 보장하는 방식으로 제도를 개편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대체불가 초격차 산업국가’는 몇 개 대기업의 힘만으로는 완성될 수 없다. 선박평형수 처리장치라는 한 우물만 20년 넘게 파고들어 국제해사기구(IMO)의 글로벌 환경 표준 자체를 주도하게 된 파나시아의 사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전 세계 바다를 누비는 선박들이 이 기업의 장비 없이는 운항할 수 없도록 만든 끈기와 독점적 기술력이 바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진짜 초격차의 본질이다. 이러한 알짜 기업들이 전국 각지에 단단한 지반을 이룰 때, 대한민국 산업은 그 어떤 외부 충격에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대체불가 초격차’의 독보적 반열에 오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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