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이 24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호남·충청권 등 지방 신규 반도체 투자가 임박했음을 시사했다. 수도권 반도체 클러스터가 포화 상태에 이르러 전력과 용수, 부지를 확보하기 어렵다는 설명이다. 국가 균형발전과 'RE100(재생에너지 100%) 대응'이라는 명분을 내밀었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2028년 총선을 의식한 표(票) 계산과 지역 안배라는 정치 논리가 깔려 있다는 의구심을 지우기 어렵다.
반도체는 수백 개의 미세 공정을 촘촘히 엮어야 하는 초정밀 지식집약산업이다. 기술의 생태계가 한곳에 뭉쳐 있을 때 발생하는 '집적(集積) 효과'가 경쟁력의 핵심이다. 파운드리 분야 부동의 세계 1위인 대만의 TSMC가 좁은 섬 안의 신주과학단지에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기업들을 단단하게 결속시킨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반면 1980년대 세계 시장을 호령하던 일본 반도체는 정부의 지역 균형발전 논리에 떠밀려 규슈, 도호쿠 등 전국으로 공장을 쪼개 지었다가 생태계 파편화와 물류비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몰락의 길을 걸었다. 역사적 반면교사가 엄연히 존재하는데도 우리 정부는 거꾸로 가려 하고 있다.
시장과 현장의 현실은 더욱 냉혹하다. 반도체 업계에는 판교와 용인 이남으로는 고급 인재들이 근무를 기피한다는 '남방한계선'이라는 말이 고착화된 지 오래다. 수백조원을 들여 지방에 최첨단 공장(팹)을 지어놓은들, 석·박사급 엔지니어들이 내려가지 않는다면 그 공장은 사상누각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호남권은 정부의 설명과는 달리 상습적인 용수 부족에 시달리는 지역인 데다, 새로 지은 재생에너지 발전소마저 송전망 부족으로 가동을 멈추는 전력 계통 포화 문제가 심각한 곳이다. 물과 전기를 적기에 공급받을 수 있을지조차 불확실한 리스크를 왜 기업이 온전히 떠안아야 하는가.
과거 광주에 투자한 대기업 가전 공장들이 비용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해외로 떠나야 했던 잔혹사, 그리고 현대자동차가 참여한 광주글로벌모터스(GGM)가 강성 노조에 얼룩진 사례도 기업들에게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다. 정치가 밀어붙이고 지자체가 장밋빛 약속을 남발해도, 시장 원리와 노사 리스크를 극복하지 못하면 결국 기업만 독박을 쓴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학습한 것이다.
지금 글로벌 반도체 시장은 미·중 패권 전쟁 속에서 1분 1초를 다투는 생존 게임을 벌이고 있다. 미국, 일본, 유럽은 자국 기업뿐만 아니라 해외 기업까지 끌어들이기 위해 수십조원의 현금 보조금을 쥐여주며 클러스터를 대형화하고 있다. 이런 엄중한 시기에 대한민국 정부는 해외 수준의 보조금 지원은커녕, 주 52시간 근로와 수도권 규제법이라는 족쇄를 채워둔 채 기업들을 사방으로 찢어놓으려 하고 있다.
정부 논리대로라면 대구나 부산 등 영남권에도, 강원권에도 반도체 공장을 쪼개 주어야 마땅하다. 이런 식의 지역 눈치 보기식 포퓰리즘이 시작되는 순간 K-반도체의 글로벌 리더십은 통째로 무너질 수밖에 없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인위적인 거점 분산 압박이 아니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의 조성을 앞당겨 기업들이 초격차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게 우선이다. 수백조원의 투자가 걸린 국가 대사는 기업의 자율적 '경영 판단'과 '시장 원칙'에 맡겨야 마땅하다. 그렇지 않으면 두고두고 큰 후유증을 낳을 것이다. 반도체마저 정치 논리에 흔들려서는 나라의 미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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