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경제의 황금기를 이끈 ‘마에스트로’… 100세로 역사 속에 잠들다
19년의 최장수 통화 사령탑…미국 4대 정권을 관통한 절대적 영향력
미국 경제 황금기 이끈 거장…‘서류가방 지표’와 데이터 집착이 만든 명성
한국 IMF 외환위기 구원투수…막후에서 만기 연장 이끌어낸 숨은 은인
독특한 모호함의 미학…시장 뒤흔든 “제 말을 이해했다면 착각” 명언
1980년대 후반부터 약 20년 동안 미국을 넘어 세계 경제의 나침반 역할을 했던 앨런 그린스펀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이 향년 10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연준은 그가 파킨슨병 합병증으로 투병하던 중 워싱턴DC 자택에서 영면했다고 22일(현지시간) 공식 발표했다.
연준은 보도자료를 통해 “앨런 그린스펀 전 의장의 별세 소식을 깊은 슬픔을 안고 접했다”며 “통화 정책과 경제 이론에 기여한 그의 업적은 연준은 물론 경제 전반과 미국 사회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겼다”고 고인을 기렸다. 아울러 그가 “상당한 경제 확장기뿐만 아니라 심각한 위기를 겪던 시기에도 연준을 이끌었다”며 재임 기간 물가 안정과 경제 성장을 동시에 달성했음을 강조했다.
그린스펀은 1987년부터 2006년까지 19년간 연준을 이끌며 윌리엄 맥체스니 마틴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긴 임기를 기록한 수장이었다. 로널드 레이건부터 조지 H.W. 부시,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까지 미국의 네 개 정권을 거치는 동안 세계 경제의 절대적인 권력자로 군림한 그의 삶은 찬란한 번영과 짙은 그림자가 공존하는 입체적인 궤적을 그렸다.
그의 가장 큰 업적으로는 1991년 3월부터 시작된 10년간의 전례 없는 미국 경제 호황과 주가 폭등이 꼽힌다. 1970년대를 짓눌렀던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을 통제하는 데 성공했고, 실업률을 1970년 이후 처음으로 4% 아래로 떨어뜨렸다.
특히 취임 직후 맞이한 1987년의 ‘블랙 먼데이’(다우존스 지수 22.6% 폭락) 위기 상황에서 신속한 유동성 공급을 약속하며 시장을 진정시킨 일화는 그의 위기 관리 능력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당시 전 세계 금융 시장이 공포에 질려 마비되기 직전이었으나, 그린스펀은 연준의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시장의 안전판을 자처하며 경제의 파국을 막아냈다.
이 시기 경제를 정교하게 조율하는 그의 솜씨를 두고 세상은 ‘마에스트로(거장)’라는 찬사를 보냈다. 그의 발언 하나에 글로벌 시장이 요동쳤고, 그가 연준 회의장에 들고 들어오는 가방의 두께를 보고 금리 변동을 예측하는 ‘서류가방 지표(Briefcase Indicator)’라는 유행어가 생길 만큼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가방이 빵빵하면 분석할 자료가 많아 금리 인상 등 정책 변화가 임박했다는 신호로 해석될 정도였다.
이러한 명성은 지독한 워커홀릭 성향과 데이터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경제의 거시적 흐름뿐만 아니라, 월별 화물차 적재량부터 철강 생산량에 이르기까지 아주 미시적인 실물 경제 지표까지 직접 꼼꼼하게 분석하길 즐겼다. 단순히 보고서를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 수시로 다른 정부 기관의 경제 전문가들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세부 사항을 논의하고 검증하는 열정을 보여주었다.
한국과의 인연도 깊어, 1997년 아시아를 휩쓴 IMF 외환위기 당시 막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국가 부도 위기에 처한 한국의 긴박한 상황을 인지한 그린스펀의 연준은 단기 대출 만기를 연장하도록 미국 대형 은행들을 직접 설득하고 압박했다. 이는 한국이 최악의 유동성 위기를 극복하고 경제 체질을 재정비할 수 있는 결정적인 시간을 벌어준 숨은 공로로 평가받는다.
그는 권력의 무게만큼이나 극도로 모호한 화법을 구사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청문회에서 한 의회 위원회에 출석한 자리에서 “여러분은 제가 한 말을 이해했다고 믿겠지만, 여러분이 들은 것이 제가 의도한 바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고 남긴 말은 유명하다. 시장에 불필요한 충격을 주지 않기 위해 교묘하게 본심을 숨겼던 그의 독특한 소통 방식을 대변하는 명언이다.
그러나 퇴임 2년 만인 2008년에 터진 글로벌 금융위기는 그의 명성에 치명적이고도 되돌릴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미국 경제를 대공황 이후 최대의 위기로 몰아넣은 이 재앙의 원인으로 그린스펀 재임 시절의 지나친 저금리 기조와 금융 시장에 대한 과도한 신뢰가 지목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고수한 장기간의 완화적 통화정책은 부동산 시장의 거품을 키우는 불씨가 되었고, 그가 강력하게 지지했던 금융 규제 완화 기조는 은행과 금융사들이 위험천만한 파생상품을 아무런 제어 장치 없이 양산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시장의 자정 능력을 과신했던 그의 철학이 결과적으로 시스템의 붕괴를 초래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결국 그린스펀 본인도 청문회 등에서 훗날 “금융 시스템과 경제 전체의 기반을 이루는 미국 은행들이 본질적으로 스스로를 규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가정한 것은 실수였다”고 고백하며 자신의 통화 정책적 과오와 판단 착오를 일부 인정해야만 했다.
뉴욕 맨해튼 출신의 그린스펀은 어릴 적부터 수학 신동으로 불렸고, 한때 줄리어드 음악원에 진학해 색소폰을 연주했을 만큼 예술적 기질도 풍부했다. 이후 뉴욕대에서 경제학 학사부터 박사 학위까지 취득한 뒤 30년 가까이 경제 컨설팅 회사를 성공적으로 운영하다가 레이건 대통령의 발탁으로 공직에 입문했다. 유가족으로는 미국의 저명 언론인인 아내 안드레아 미첼 여사가 있다. 자본주의 최전선에서 세계 경제의 흥망성쇠를 조율했던 거인은 공과 과라는 묵직한 유산을 남긴 채 역사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권순욱 기자(kwonsw87@dt.co.kr)실시간 주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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