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로스앤젤레스(LA) 소파이 스타디움에서 열린 이란과 뉴질랜드 월드컵 축구 경기에서 현 이란 정권에 반대하는 이란계 미국인들이 옛 팔레비 왕조 시절 국기를 펼쳐 들고 있습니다. 로이터 연합뉴스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소파이 스타디움에서 열린 이란과 뉴질랜드 월드컵 축구 경기에서 현 이란 정권에 반대하는 이란계 미국인들이 옛 팔레비 왕조 시절 국기를 펼쳐 들고 있습니다. 로이터 연합뉴스

이란 축구대표팀이 2026 FIFA 북중미 월드컵 첫 경기에 나선 날, 경기장 안팎에서는 이란계 미국인들의 엇갈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경기장에서 가장 눈에 띈 것은 선수들이 아니었습니다. 이란 대표팀을 응원하는 사람들과 이란 정권에 항의하는 사람들이 같은 공간에 모여 서로 다른 입장을 극명하게 드러냈습니다.

지난 15일(현지시간)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LA) 소파이 스타디움에서 이란과 뉴질랜드 경기가 벌어지자 수많은 이란계 관중이 경기장에 모여들었습니다. 이 가운데 일부는 경기 시작 전 황금 사자와 태양이 그려진 옛 팔레비 왕조 시절 국기를 흔들며 현 이슬람 정권에 대한 반대 의사를 피력했습니다. '이란을 다시 위대하게'(Make Iran Great Again)라는 구호가 새겨진 피켓을 들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시위에 참여한 아이다 몬파레드는 뉴욕포스트에 "이란 축구대표팀은 이란 국민을 대표하지 않는다"며 "이틀 사이에 4만명을 학살한 이란 정부를 대표한다"고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이란계 미국인이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경기장 밖에선 또 다른 시위대가 정치와 축구를 분리하자고 외치며 행진했습니다. 일부는 이란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응원에 나섰고, 선수들의 이름이 적힌 깃발을 흔들었습니다. 이들을 향해 야유를 보내는 사람들도 있어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경기장 내에서도 정치적 메시지는 이어졌습니다. 국제축구연맹(FIFA)이 경기장 내 이란 옛 국기 반입을 금지했지만, 관중석 곳곳에서 해당 국기가 포착됐습니다. 팔레비 왕조 국기를 티셔츠로 만들어서 입고 온 팬들은 입장을 제지당했고, 이를 뒤집어 입고 나서야 경기장에 들어설 수 있었습니다. 해당 티셔츠를 입고 경기장에 들어선 메흐디는 "내 조국의 진정한 국기이기 때문에 이를 티셔츠로 만들어 입었다"고 강조했습니다. 또다른 여성은 옛 이란 국기를 드레스처럼 몸에 두른 뒤 "나는 응원하러 온 것이 아니다. 이란 사람들의 목소리를 전하러 왔다"고 말했습니다. 이들은 이란 국가가 흘러나올 때 냉담한 반응을 보였는가 하면 이란 대표팀이 아닌 뉴질랜드 대표팀의 골에 환호했습니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골대 뒤 관중석에 등장한 '미나브(MINAB) 168' 배너였습니다. 골대 뒤에 앉아있던 관중 8명은 미국의 공습으로 이란 미나브 지역 학교에서 아동 168명이 사망한 사건을 규탄하며 이 배너를 들어올렸고, 곧바로 관계자들에 의해 압수당했지만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 인근 관중석에는 '42,000 #이란 학살'이라는 배너도 등장했습니다. 이는 이란 정권이 올해 학살한 자국민 수를 뜻한다고 합니다.

이처럼 축구 경기장이 정치 집회장으로 변한 데는 LA의 특수한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LA는 미국에서 이란계 이민자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도시입니다. '테헤랑젤레스'(Tehrangeles)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입니다. 현재 약 20만~30만명의 이란계 미국인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들 상당수는 1979년 이란 혁명 이후 미국으로 이주했습니다. 그들에게 이란은 그리운 고향이지만 동시에 아픈 기억이기도 합니다.

이날 경기는 2 대 2 무승부로 끝났습니다. 이란 팀은 경기 막판까지 끈질기게 맞서 싸운 끝에 극적인 무승부를 거두어 승점 1점을 챙겼습니다. 팀의 정상적 운영이 불가능한 환경에서 거둔 결과였습니다. 더 큰 관심은 이란계 미국인들의 엇갈린 반응에 쏠렸습니다. 모두가 조국을 떠나온 이민자들이지만 누구는 대표팀을 응원했고, 누구는 항의의 목소리를 냈습니다. 여기에는 조국에 대한 그리움과 분노, 희망과 상처가 함께 담겨 있었습니다. 이날 소파이 스타디움은 이란 축구의 현재가 아니라, 혁명 이후 이어진 이란 사회의 분열과 갈등을 압축적으로 보여준 거울이었습니다.

박영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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