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공습에 속수무책 걸프국들 美안보우산 의심

피해국 자신들의 목소리가 철저히 소외된 데 환멸

당장 미국과 관계 단절하거나 대체 세력 찾기 난망

방산, 한국 등으로 다변화…집단안보체제 모색할 듯

호르무즈해협. 전쟁 발발 후 이란이 봉쇄하면서 걸프 국가들은 에너지 소송로가 막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로이터 연합뉴스
호르무즈해협. 전쟁 발발 후 이란이 봉쇄하면서 걸프 국가들은 에너지 소송로가 막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로이터 연합뉴스

미국과 이란이 전쟁 발발 106일 만에 종전에 합의했으나, 이번 전쟁이 남긴 지정학적 파장은 걸프 아랍 국가들의 안보 지형을 근본적으로 뒤흔들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15일(현지시간) 보도를 통해 전통적으로 미국이 제공하는 안보 우산과 보호 약속에 전적으로 의존해 온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UAE), 카타르 등 걸프 협력회의(GCC) 회원국들이 이제 수십 년간 이어져 온 친미 안보 패러다임의 실효성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며 전면적인 재검토에 착수했다고 조명했다.

외교관들과 지역 안보 전문가들의 분석에 따르면, 이번 전쟁에서 이란은 군사적 타격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는 오히려 대담해진 반면, 미국의 동맹국인 걸프 국가들은 미국의 보호 능력과 의지에 대해 깊은 환멸과 불신을 품게 됐다.

그동안 걸프 국가들은 막대한 자국 내 인프라 투자와 에너지 수출로 확보 차원에서뿐 아니라 위기 시 미국이 개입해 자국을 지켜줄 것이라는 굳건한 신뢰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 카타르의 대규모 액화천연가스(LNG) 단지를 비롯한 걸프 지역 내 핵심 민간 에너지 기지와 인프라가 이란 및 친이란 무장세력의 무인기 및 미사일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되고 수십억 달러 규모의 경제적 타격을 입으면서 이러한 안보적 전제는 처참히 무너졌다. UAE 역시 백주 대낮에 이란 드론 공격이 주요 핵심시설을 강타하는 것을 목도할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상황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쿠웨이트, 바레인, 사우디아라비아도 예외가 아니다.

걸프 지도자들을 더욱 당혹스럽게 만든 것은 전쟁의 도화선이 된 미국과 이스라엘의 대이란 강경 군사 행동 과정에서 정작 직접적인 보복 위험을 감내해야 하는 자신들의 목소리와 전쟁 반대 의견이 워싱턴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철저히 소외되었다는 점이다.

저가 드론과 미사일을 동원한 이란의 비대칭 전술이 미국의 첨단 방공 시스템인 사드(THAAD)마저 흔드는 현실을 목격한 UAE와 사우디 등은 이제 자국 내 배치된 미군 기지가 안보 자산이 아니라 이란의 보복을 끌어들이는 안보적 부담이자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우려를 숨기지 않고 있다.

호르무즈해협의 봉쇄와 물류 마비가 자국 경제 체력의 취약성을 여실히 드러낸 상황에서, 걸프 국가들은 미국이 이란의 정권 교체나 완전한 억제를 이뤄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무모한 군사적 모험주의로 동맹국의 안전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냉혹한 현실을 깨닫게 됐다.

이에 따라 호르무즈 해협의 재개방과 대화 국면이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걸프 지역은 미국의 단일 패권에 의존하는 대신 이란을 지역 내 공존해야 할 엄연한 실체로 인정하고 테헤란과의 직접적인 경제·안보적 타협과 대화를 심화하는 ‘수용과 헤징’ 전략으로 급격히 선회하고 있다는 것이 NYT의 분석이다.

물론 수십 년간 축적된 군사 장비의 상호 운용성과 경제적 결속력 때문에 걸프 국가들이 당장 미국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거나 미국을 대체할 새로운 단일 파트너를 찾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향후 방산 조달처를 유럽, 한국 등으로 다변화하고 독자적인 지역 집단안보체제를 모색하려는 움직임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가속화될 전망이다.

NYT의 심층 보도는 미국 중심의 일방향적 ‘허브 앤 스포크’(Hub-and-Spoke) 안보 동맹 모델이 현대 비대칭 전장과 다극화된 국제 질서 속에서 얼마나 심각한 구조적 한계에 봉착했는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과거의 안보 동맹이 압도적인 군사력을 보유한 패권국의 서약만으로 유지될 수 있었다면, 현대의 지정학적 위험은 첨단 방공망을 무력화하는 가성비 높은 드론 전술과 공급망 교란이라는 고도로 복잡한 형태로 진화했다. 패권국의 ‘사후 보복 능력’이 동맹국의 ‘사전 피해 예방’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맹점이 여실히 드러났다는 것이다.

특히 미국이 동맹국의 사활이 걸린 경제적·지리적 취약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자국의 국내 정치적 필요나 특정 동맹국의 이익만을 우선시해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킬 때, 그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아야 하는 다른 동맹국들의 전략적 자율성 확보와 외교적 다변화 추구는 생존을 위한 필연적 선택이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번 전쟁을 계기로 걸프 국가들이 보이는 대이란 직접 협상과 방산 다변화 움직임은 단지 일시적 이탈이 아니라, 미국의 안보 약속이 갖는 예측 불가능성과 불완전성을 극복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보인다.

이규화 대기자(david@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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