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예금 3년 5개월만에 최고
서학개미 美 증시 순매수 전환
강달러·외인매도 등 복합요인
평균 1523원… 환란 이후 최고
정부가 원·달러 환율 안정을 위해 구두 개입과 외환 공동검사, 수출기업 간담회까지 꺼내 들었지만 환율은 1500원대에서 좀처럼 내려오지 않고 있다.
수출 대기업들은 벌어들인 달러를 곧바로 환전하지 않고 보유하고 있고, ‘서학개미’로 불리는 개인 투자자들은 세제 혜택이 끝나자 다시 미국 증시로 발길을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과 개인의 달러 수급이 당국 기대와 반대로 움직이면서 정부 대책이 시장에서 힘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기업 달러예금 3년 5개월 만에 최대… “환전 미루고 일단 보유”
14일 금융권에 따르면 지난 11일 기준 국내 5대 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의 기업 달러예금 잔액은 543억7100만달러로 집계됐다.
2023년 1월 말 이후 3년 5개월 만에 가장 많은 규모로 이달 들어서만 열흘 남짓한 기간에 36억5800만달러 급증했다.
기업들이 이처럼 달러를 쌓아두는 것은 고환율과 대외 불확실성이 맞물린 결과로 풀이된다. 최근 반도체와 자동차 등을 중심으로 수출이 늘면서 기업으로 들어오는 달러는 많아졌지만 이를 곧바로 원화로 바꾸기보다 환전 시점을 늦추는 분위기가 강해졌다. 환율 추가 상승 가능성과 수입대금 결제, 외화부채 상환 부담 등을 고려해 달러 유동성을 확보하려는 수요가 커진 것이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고환율이 길어질 수 있다는 불안이 큰 상황에서 기업들은 당장 필요한 결제자금과 차입금 상환 재원을 먼저 확보하려는 분위기”라며 “수출로 들어온 달러도 시장에 바로 내놓기보다 보유 기간을 늘리는 사례가 많아졌다”고 말했다.
기업들의 달러 쟁여두기가 심화하자 기획재정부와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 11일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주요 수출기업을 다급히 소집해 수출대금의 신속한 환전과 해외 유보자금의 국내 유입을 당부하고 나섰다.
그러나 반도체 등 수출 호조로 벌어들인 달러가 늘어난 상황에서도 기업들은 원화 환전 시점을 늦추고 있다. 대외 불확실성에 대비해 결제 대금과 외화부채 상환용 유동성을 확보하려는 실수요가 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정부 요청만으로 달러를 내놓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고환율이 장기화할 가능성이 남아 있는 데다 원자재 결제와 외화부채 상환 등 실제 달러 수요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기업 외화예금을 건드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기업들이 환투기를 하려고 달러를 보유하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고, 채권 등으로 보유한 자금을 바로 현금화하기도 쉽지 않다”고 말했다.
◇서학개미도 다시 미장으로… 달러 수급은 당국 기대와 반대로
개인 자금도 정부 기대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한국예탁결제원 증권정보포털에 따르면 서학개미들은 지난 8~12일 미국 주식시장에서 8억달러어치를 순매수했다. 6월 첫째 주 7억9000만달러 순매도에서 한 주 만에 매수 우위로 돌아선 것이다. 이 기간 미국 반도체 3배 레버리지 상장지수펀드(ETF)인 ‘속슬’에만 17억5000만달러가 몰리며 미국 반도체주와 인공지능(AI) 관련 종목에 대한 투자 열기가 다시 살아나는 분위기다.
정부가 해외주식 투자자금의 국내 복귀를 유도하기 위해 국내시장복귀계좌(RIA) 등 유인책을 내놨지만, 세제 혜택 종료 이후 미국 빅테크와 반도체주에 대한 기대가 되살아나면서 개인 투자자들의 달러 수요도 다시 커지고 있는 것이다.
기업은 달러를 팔지 않고 개인은 미국 주식을 사기 위해 달러를 찾는 흐름이 맞물리면서 환율 하락 압력도 약해지고 있다.
시장에 공급되는 달러는 줄어드는 반면 해외투자용 달러 수요는 다시 살아나는 셈이다. 정부가 구두 개입과 외 환 공동검사, 수출기업 간담회까지 동원했지만 민간 수급은 당국 기대와 엇갈리고 있다.
이에 당국의 외환시장 대응도 실효성 측면에서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정부는 연일 경고성 메시지를 내놓고, 한국은행과 금융감독원은 2012년 이후 14년 만에 시중은행을 상대로 외환 공동검사에 착수했다. 역외 시장(NDF)의 투기성 쏠림을 단속해 변동성을 낮추겠다는 취지다.
그러나 환율 상승의 배경이 기업의 달러 보유, 개인의 해외투자 수요, 외국인의 국내 주식 순매도, 대외 강달러 압력 등 복합적 요인에 있는 만큼 단기 조치만으로 시장 흐름을 돌리기는 쉽지 않다는 지적이다.
원·달러 환율은 지난달 15일 이후 19거래일째 1500원대에 머물고 있다. 이달 들어 원·달러 환율 평균은 주간거래 종가 기준 1523.3원으로, 외환위기 당시인 1998년 2월 1626.8원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이달 일일 변동폭은 10.1원으로 5월 6.6원, 4월 8.9원보다 커졌다.
전문가들도 대외 여건이 개선되지 않는 한 고환율 흐름이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이진경 신한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대외 강달러와 외국인의 주식 수급 이탈 압력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원·달러 환율이 1500원 초중반에서 높은 변동성을 보이고 있다”며 “미국과 이란의 종전 최종 합의 등 지정학적 리스크가 완전히 해소되거나 외국인의 매수 복귀가 확인되기 전까지는 하방경직적인 흐름이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유진아 기자 gnyu4@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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