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서 논설위원
찰스 3세 영국 국왕의 공식 생일을 기념하는 군기분열식(Trooping the Colour)이 13일(현지시간) 버킹엄궁과 인근 호스가즈 퍼레이드 등지에서 열렸다. 국왕 생일 기념 군기분열식은 1760년 조지 3세 때부터 연례행사로 자리 잡았고, 현대 들어서는 국왕의 실제 생일과 관계없이 날씨가 좋은 6월에 열린다. 77세인 찰스 3세의 실제 생일은 11월 14일이다.
군사적 측면보다 왕실의 지속성과 존재감을 알리는 데 더 큰 비중이 있다. 영국이 수많은 정치적 변화와 정권 교체를 겪어도 왕실만큼은 변함없이 국가의 상징으로 남아 있음을 보여주는 의식인 셈이다.
올해 행사는 찰스 3세 즉위 이후 네 번째 군기분열식이었다. 지난 2024년 군기분열식 때는 찰스 3세와 며느리인 케이트 미들턴 왕세자빈이 모두 암 진단을 받은 직후라 이목이 쏠렸었다. 올해는 왕실 주요 구성원들이 대부분 모습을 드러내며 왕실의 안정성을 대내외에 과시했다. 이들을 보기 위해 시민과 관광객 등 인파가 일대에 몰렸다.
찰스 3세와 커밀라 왕비, 케이트 왕세자빈과 세 자녀, 고(故) 엘리자베스 여왕의 사촌인 글로스터 공작 부부 등이 마차 여러 대에 나눠 타고 버킹엄궁을 출발해 궁 앞 대로인 더몰을 따라 호스가즈 퍼레이드까지 행진했다. 윌리엄 왕세자와 찰스 3세의 동생 앤 공주, 에드워드 왕자는 말을 타고 행진하며 왕실의 전통과 위엄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찰스 3세는 호스가즈 퍼레이드에서 키어 스타머 총리를 비롯한 정부 주요 인사들과 근위대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군을 사열했다. 사열 이후 왕실 가족들은 인파의 환호를 받으며 버킹엄궁으로 돌아갔다. 국왕은 가족들과 함께 버킹엄궁 발코니에 올라 영국 왕실 공군 곡예비행단 ‘레드 애로스’의 공중분열식을 지켜봤다.
사람들의 시선은 발코니에 모였다. 찰스 3세를 비롯해 윌리엄 왕세자와 그 자녀인 조지 왕자, 샬럿 공주, 루이 왕자가 나란히 섰다. 영국 왕위 계승 서열 1위부터 4위까지가 자리를 같이 한 것이다. 국민들에게 보내는 왕실의 메시지는 분명했다. 왕실은 여전히 안정적이며, 다음 세대까지 이어질 준비가 되어 있다는 신호였다.
그러나 왕실이 안고 있는 균열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한때 왕실의 인기 스타였던 해리 왕자 가족은 올해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가족 불화 속에 왕실 업무에서 물러나 미국으로 건너간 해리 부부는 여전히 갈등을 봉합하지 못하고 있다.
더 민감한 인물도 있었다. 성범죄자 제프리 엡스틴과의 연루 의혹으로 왕실에서 사실상 퇴출된, 찰스 3세의 동생 앤드루 마운트배튼 윈저와 그 가족 역시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다. 대신 행사장 주변에는 군주제 반대 단체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앤드루의 사진과 함께 ‘내 왕이 아니다(Not My King)’라는 팻말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
영국 왕실은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군주제라는 평가를 받지만 최근 들어 왕실의 존재 이유를 묻는 목소리도 점차 커지고 있다. 이날 왕관은 여전히 빛나고 있지만, 가족 갈등, 시대 변화에 따른 군주제 존립 논란이라는 그림자도 함께 드리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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