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선거를 막으라 만든 헌법기관이 부정선거 음모론의 가장 큰 숙주
1960년의 악몽을 막기 위해 세운 선관위가 다시 4·19의 기억을 불러
선거를 정치에서 떼어내려 만든 방패가 다시 정치의 칼날을 부른 역설
독립성은 정권과 정당을 막는 장치였지 국민의 의심을 막는 성벽 아냐
음모론은 밀실에서 독하게 번진다. 이번 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위험한 건, 선거를 공정하게 관리해야 할 헌법기관 스스로가 음모론이 폭식할 완벽한 밀실을 차려줬기 때문이다. 지금 국민이 묻는 건 진영논리가 아니다. "내 '참정권'이 제대로 살아있냐"는 민주주의의 최소 조건이다.
전국 140곳에 투표용지가 추가 송부됐고, 26곳에선 투표가 멈췄다. 증거보전 결정이 내려진 보관 상자는 폐기물 트럭에 실려 갔다. "증거인멸 의도는 없었다"는 선관위의 항변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넘긴 건 단순한 종이상자가 아니라 주권자의 마지막 신뢰였다.
사람들의 뇌리에는 '3·15 부정선거'의 망령이 겹쳐지고 있다. 문제의 본질은 거리로 나온 청년들이 이 기시감을 '현실'로 느낀다는 점이다. 신뢰를 잃은 선거는 거리를 덮친다. 4·19의 교훈은 개표 오차가 아니라, 국가를 향한 의심이 임계점을 넘을 때 헌정질서가 붕괴하는지를 보여준 핏빛 기록이었다.
헌법은 권력이 선거를 흔들지 못하게 막기 위해 선관위를 독립시켰다. 이 독립성은 선거를 정치에서 분리하기 위한 거대한 '방패'였다. 그러나 그 방패는 지금 국민의 합리적 의심마저 튕겨내는 성벽으로 변질됐다. 감사의 사각지대에 숨고, 수사의 칼날 앞에서 무소불위의 독립성을 외치는 것은 고립이자 오만이다. 정권의 입맛에 휘둘리지 말라고 준 독립성은 '무능과 폐쇄성'으로 변질됐다.
방패가 썩자 정치의 칼이 여지없이 날아들었다. 경찰이 선관위를 전격 압수수색하고, 국회는 국정조사를 들이밀며, 국무총리는 "해체 수준의 개혁"을 선언했다. 선거를 정치에서 떼어내라고 만든 기관이 헛발질을 거듭한 끝에, 선거제도 통째를 다시 정치판의 수술대 위에 올려놓았다. 정치가 선거에 개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든 제도를, 이제 다시 정치가 개입해 수습하고 해체해야 하는 기막힌 모순. 이것이 헌정질서 위기의 진짜 민낯이다.
거리로 나온 청년들을 단순히 '음모론자'로 치부해선 안 된다. 조롱하고 뭉개는 순간, 의심은 확신이 되고 음모론은 종교가 된다. 부정선거 음모론을 막는 방법은 밀실의 문을 열고 불을 켜는 일이다. 방패가 썩어 정치의 칼을 불렀다면 그 책임은 방패를 특권으로 착각한 선관위에 있다. 선관위가 헌정질서의 안전장치로서 스스로를 증명하지 못한다면, 음모론의 시대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김윤정 기자 kking152@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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