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를 보면 한 시대에 만고의 충신과 간신이 함께 활동했던 시기가 있다. 남송(南宋) 시대의 충신 악비(岳飛)와 간신 진회(秦檜)가 대표적이다. 장군 악비는 대한민국의 이순신 장군처럼 중국 역사상 최고의 ‘구국 영웅’과 ‘민족 영웅’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여진족의 금(金)나라가 쳐들어와 북송(北宋)이 멸망하고 남송이 세워진 국가적 위기 속에서 나라를 지켜냈다. 진회는 남송 시대의 재상으로, 악비를 모함해 죽인 간신이자 매국노의 대명사로 통한다.
북방에서 세력을 키운 금나라는 1125년 11월 송(당시 북송)을 침락한다. 이후 두 나라 사이에는 수십 년에 걸쳐 대규모 전쟁이 반복됐다. 1126~1127년 금나라 군대는 송나라의 수도인 카이펑(개봉)을 함락한다. 이 과정에서 송나라의 황제였던 휘종과 흠종을 비롯한 황족들은 포로로 잡혀갔고, 이로 인해 북송이 멸망했다. 이른바 ‘정강의 변 (靖康之變)이다. ’정강‘은 흠종의 연호다.
겨우 도망친 황족 조구(남송 고종)가 양쯔강 남쪽의 임안(항저우)으로 내려가 남송을 세운다. 금나라는 남송을 없애기 위해 양쯔강을 넘어 끊임없이 군대를 보냈다. 이 시기 활약한 인물이 바로 악비다.
악비는 원래 한족의 귀족이였으나 이후 노비로 강등된 가난한 농노 집안에서 자랐다. 고향은 현재의 허난(河南)성 안양시(安阳市) 탕음현(湯陰縣)이다. 태어나자마자 황하가 범람해서 고향이 파괴되고, 부친인 악화(岳和)는 그가 어렸을 때 홍수에 익사해 악비와 모친인 요부인(姚夫人)은 허베이(河北)성에 정착했다.
악비는 기골이 장대하고 무술과 궁술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다. 11살부터 검술과 창술 사범으로 유명한 진광(陳廣)에게 창술, 성인이 된 후에는 주동(周同)에게 궁술을 배웠다. 송사(宋史) 악비전에는 악비가 300척(90m)까지 활을 쏘고 노(弩)라고 불리는 석궁을 8석까지 다룰 수 있는 명궁수로 기록하고 있다.
그가 군에 몸담을 때 어머니는 그의 등에 ‘정충보국’(精忠報國)이라는 네 글자를 문신으로 새겨주었다. ‘목숨을 다해 나라에 보답하라’는 뜻이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또한 중국의 어린이 날 한 초등학교에 방문해 초등학생이 쓴 ‘정충보국’이라는 네 글자를 보고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이 네 글자를 가슴에 새겨두고 되새겼다”라고 했다고 한다.
악비가 이끈 ‘악가군’(岳家軍)은 백전백승 무적의 군대였다. 군율이 엄격해 “굶어 죽어도 민가를 약탈하지 않고, 얼어 죽어도 민가를 허물지 않는다”는 철칙을 지켰으며, 전쟁의 도탄에 신음하는 백성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당시 금나라 군에서는 “태산을 움직이기는 쉬워도 악비의 군대를 움직이기는 어렵다”라는 말까지 나왔다. 악가군은 옛 수도 카이펑 근처까지 진격하며 빼앗겼던 북방 영토를 되찾는 북벌을 성공적으로 주도했다.
하지만 적은 금나라 군이 아니라 내부에 있었다.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어 했던 남송의 황제 고종과 재상 진회에겐 악비가 눈엣가시였다. 결국 진회 일파의 모함으로 악비는 감옥에 갇혔고, 1142년 39세라는 젊은 나이에 처형당하게 된다. 한 장수가 악비의 죄명이 무엇이냐고 따져 묻자, 진회는 “있었을지도 모른다(막수유·莫須有)”라는 무책임한 답변을 했다. 이 말은 그후 중국에서 ‘터무니없는 모함’을 뜻하는 대명사가 됐다.
항저우 서호(西湖) 서북쪽 자락에는 악비의 묘인 악왕묘가 있다. 악왕묘는 남송 가정(嘉靖) 14년(공원 1221년)에 처음 건축됐다. 묘의 대문을 지나면 악비의 동상이 있는 충렬사가 있고, ‘심소천일’(心昭天日·마음이 하늘의 해처럼 밝다)이라는 네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대전으로 들어가면 높이 4.5m에 달하는 악비의 채색 동상이 보인다. 동상 위 편에는 악비가 썼다고 하는 ‘환아하산’(還我河山· 나의 강산을 돌려받는다)’이라는 금색 글귀가 있다. 동상의 좌우에는 ‘벽혈단심’(碧血丹心·푸른 피에 붉은 마음), ‘정충보국’(精忠報國·정성과 충성을 다해 국가에 보답한다), ‘충의상소’(忠義相昭·충성과 의리가 세상에 널리 밝혀져 빛나다), ‘호기장존’(浩氣長存·넓고 큰 정기가 영원히 남아 있다)이라는 글귀들이 보인다.
악왕묘는 한족 민족주의를 신봉하는 중국인들에 성지와도 같은 곳이다. ‘민족의 빛’(民族之光·민족지광)으로 불리는 악비는 사후에 명예가 회복돼 ‘악왕’으로 추존됐으며, 민간에서는 군신(軍神)의 반열에 올라 숭배받고 있다. 악왕묘 앞에는 손이 뒤로 묶인 채 무릎을 꿇고 있는 진회 부부의 철상이 세워져 있으며, 중국인들은 지금도 이 동상에 침을 뱉으며 진회의 간신 행위를 비판한다고 한다. 중국인들이 이름에 진회(秦檜)의 ‘회’(檜)자를 쓰지 않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만강홍’(滿江紅·강물이 온통 붉게 물들다)은 악비가 남긴 유명한 애국 시로 알려져 있다.
노발충관빙난처, 소소우헐 (怒髮衝冠憑欄處, 瀟瀟雨歇·성난 머리칼은 머리위에 쓴 관을 뚫을 지경인데, 난간에 기대어 바라보니 쓸쓸히 내리던 비가 그치네)
대망안, 앙천장소, 장회격렬 (抬望眼, 仰天長嘯, 壯懷激烈·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크게 소리지르니, 장사의 감회가 끓어오른다)
삼십공명진여토 (三十功名塵與土·삼십년간 쌓은 공명이 한갓 먼지에 불과하고)
팔천리로운화월 (八千里路雲和月·팔천리 내달렸던 길도 그저 구름과 달빛처럼 흔적이 없구나)
막등한, 백료소년두, 공비절 (莫等閒, 白了少年頭, 空悲切·더이상 기다릴 수 없다. 젊었던 머리카락은 어느새 희어졌으니, 그저 마음이 비감할 뿐)
정강치유미설 (靖康恥猶未雪·정강의 치욕은 아직 갚지 못했으니)
신자한하시멸 (臣子恨何時滅·신하로서의 한을 어느 때나 없앨 수 있을 것인가)
가장거, 답파하란산결 (駕長車, 踏破賀蘭山缺·전차를 몰고, 하란산을 짓밟아 무너뜨리리라)
장지기찬호로육 (壯志饑餐胡虜肉·배고프면 오랑캐의 살로 배를 채우며)
소담갈음흉노혈 (笑談渴飮匈奴血·목마르면 흉노의 피를 마시리라)
대종두,수습구산하, 조천궐 (待從頭, 收拾舊山河, 朝天闕·옛 산하를 다시 되찮은 후에 황제를 만나러 가리라)
하지만 일각에선 악비의 신화는 후손 등에 의해 과장된 것이라는 얘기도 있다. ‘만강홍’도 명나라때 문인이 악비의 이름을 빌어 지은 위작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악왕묘는 아이러니하게도 중국에서 역사적 논란의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다. 중국 당국이 악비를 민족 영웅이 아니라 충성스런 장군쯤으로 위상을 격하시킨 것이다. 악비가 무찌른 금나라 등 “오랑캐의 역사도 중국 역사의 일부”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종의 ‘역사공정’이다.
어찌됐든 악비는 절개를 지키다 죽어 간 문천상(文天祥)과 더불어 송나라의 2대 충신이자 충절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명(明)나라에 의해 중원이 수복된 이후 문천상과 악비, 그리고 제갈량(諸葛亮)에 대한 숭배가 국가적 차원에서 장려돼왔다.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악비는 외세의 침략에 대항해 투쟁한 구국의 영웅으로 칭송돼왔으며, 지금까지 관우(關羽)와 함께 민간에서 무신(武神)으로 대우받을 만큼 지지를 받고 있다.
강현철 논설실장(hckang@dt.co.kr)실시간 주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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