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살리려 나섰더니 노조 교섭장으로 끌려나왔다. 법이 법을 들이받는 얄궂은 모순 속에 건설업계가 옴짝달싹 못 하고 있다.
이 정도면 딜레마를 넘어선 가혹한 진퇴양난이다. 정부의 엄격한 산재 근절 기조에 발맞춰 하청 현장의 안전 관리에 팔을 걷어붙였던 원청 건설사들이 예기치 못한 '노란봉투법의 덫'에 갇혀버렸다.
10일 건설업계에 따르면 지난 3월 개정 노동조합법 시행 이후 불과 석 달 만에 10대 대형 건설사 중 9곳이 노동위원회로부터 하청 노조에 대한 사용자성을 잇따라 인정받으면서 업계 전체에 비상이 걸렸다.
근로자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원청의 '안전 개입'이 도리어 하청업체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결정적 증거로 둔갑하하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건설사들의 한숨만 깊어지고 있다.
삼성물산은 지난 4월 서울지방노동위원회로부터 사용자성이 인정돼, 최근 하청 건설노조의 단체교섭 요구 사실을 공고했다. 현대건설과 GS건설, 현대엔지니어링, 포스코이앤씨, 롯데건설, SK에코플랜트, IPARK현대산업개발 등도 노동위로부터 하청 노조에 대한 사용자성 인정을 받았다.
DL이앤씨도 지난 5일 서울지노위에서 사용자성을 인정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DL이앤씨 측은 "사용자성 인정 여부는 구체적인 결정서를 수령해봐야 알 수 있다"고 전했다.
전남지노위에서 사용자성이 인정되지 않았던 중흥건설과 중흥토건은 최근 중앙노동위원회에서 앞선 판정을 뒤집고 사용자성이 인정됐다. 앞서 지노위는 두 건설사를 근로조건 등에 대한 실질적 지배력을 결정할 수 있는 지위로 보지 않았는데, 중노위에선 산업안전 의제에 대해 원청이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지배·결정할 수 있는 지위에 있어 사용자로 인정된다고 본 것이다.
업계에선 건설업 특성상 안전관리 문제를 발주자가 신경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인 터라 사용자성이 인정될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토로가 나온다.
한 대형건설사 관계자는 "건설업의 경우, 안전 관리 문제 때문에 사용자성이 쉽게 인정되는 상황이라 고민"이라며 "안전관리는 원청도 함께 책임지는 만큼 손을 놓을 수 없어 관리에 나서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노동조합과 직접 교섭을 해야하는 난관에 부딪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건설사 관계자는 "현재 안전사고 발생 시 원청도 책임을 지는데, 안전관리를 근거로 사용자성이 인정될 경우 향후 안전관리상 허점이 생길 수 있다"며 "만약 추후 교섭 단위 분리도 인정된다면 교섭 대상 증가에 따라 시간 소요가 늘어나고 교섭대상자별 교섭결과에 따른 민원 발생으로 추가 갈등도 우려된다"고 전했다.
산업안전보건법 제63조는 '도급인은 관계수급인 근로자가 도급인의 사업장에서 작업을 하는 경우 관계수급인 근로자의 산업재해를 예방하기 위해 안전 및 보건 시설의 설치 등 필요한 안전조치 및 보건조치를 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어 원청인 건설사 입장에선 안전 조치에 관여하지 않을 수 없다.
전문가들은 산업재해 감소를 위해 발주자가 안전 문제에 개입할 경우 사용자성을 인정하는 현 제도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내놨다.
정진우 서울과기대 안전공학과 교수는 "발주자들도 산재 감소를 위해 (하청 업체와) 함께 안전 문제에 신경쓰고 챙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한데, 발주자가 안전 문제를 챙기면 지휘·감독을 하는 것으로 보고 의무 주체로 판단하는 점이 역설적으로 안전관리 강화의 발목을 잡고 있다"며 "여러 노동 정책이 실효성을 낼 수 있도록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안다솜 기자 cotton@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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