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준호 부국장 겸 IT과학바이오부장
이란 전쟁이 100일째를 맞았지만 중동 정세는 또다른 미로에 빠져든 모습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 주요국에 이란전 종전 대가로 아브라함 협정 참여를 요구하면서다.
지난달 23일(현지시간) 트럼프 대통령이 중동 주요국 지도자들과의 다자간 전화통화에서 이 요구를 하자 모두의 말문이 막혀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는 보도가 나왔다. 사우디 지도자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이미 노(no)라고 100번 말했다”며 격분했다는 얘기도 전해졌다.
상대방이 받을 수 없는 요구를 한 뒤 협상을 시작하는 것이 트럼프 대통령의 스타일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번 요구는 이란 전쟁을 끝내더라도 중동 여러 국가와의 아브라함 협정 확대 협상은 이어나갈 뜻임을 시사한다.
세계 최대 석유 소비국인 미국은 과거 중동의 원유를 안전하게 수입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했다. 그래서 외교력과 국방력의 상당 부분을 중동에 집중했다. 그러나 2010년대 초중반 ‘셰일 혁명’으로 에너지 자립을 이루자 중동의 전략적 중요성이 예전같지 않게 됐다. 그래서 버락 오바마 행정부 시절 미국은 중동에서 발을 빼고 중국 견제에 집중하겠다는 방침을 세운다. 이것이 ‘피벗 투 아시아’, ‘리밸런싱’ 등으로 불리는 세계전략이다.
그런데 중동에서 빠져나오려면 두 가지가 필요했다. 하나는 이란의 핵개발을 저지시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스라엘과 중동 내 친미국가를 수교시켜 지역 정세를 안정시키는 것이다. 오바마 행정부는 2015년 이란핵합의(JCPOA)로 이란 핵 프로그램을 제한시켰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중동 내 친미국가의 수교는 이끌지 못했다.
뒤이어 들어선 트럼프 1기 행정부는 JCPOA를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이란에 ‘최대 압박’을 가해 굴복시키는 쪽으로 전략을 바꾼다. 대신 아랍에미리트(UAE), 바레인 등 중동 수니파 친미국가들과 이스라엘의 수교를 이끌어 냈다. 이를 아브라함 협정이라고 부른다. 트럼프는 아브라함 협정이 중동 정세 안정과 함께 이란을 고립시키는 데도 효과가 있을 것으로 봤다.
현재의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중동을 대하는 방향은 1기 때와 정확히 같다. 이란을 힘으로 제압해 핵 프로그램을 좌절시키는 동시에, 이란을 두려워하는 친미 국가들을 이스라엘과 하나로 묶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미국 없이도 굴러가는 안보 네트워크를 만든 뒤 중동에서 발을 빼고 중국에 집중하겠다는 속내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의 뜻대로 아브라함 협정이 확대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아브라함 협정 참여를 요구받은 국가는 사우디, 카타르, 튀르키예, 파키스탄, 이집트, 요르단 등인데 수니파의 맹주 사우디부터 이 요구에 응할 생각이 없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을 각각의 국가로 인정하라는 ‘두 국가론’이 전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스라엘과 수교할 수 없다는 게 사우디의 변하지 않은 생각이다. 다른 국가들 역시 이스라엘과 좋게 지낼 경우 자국 내 이슬람 강경파의 저항과 반발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결국 아브라함 협정 확대 문제는 지루하게 이어지는 장기적 ‘밀당’이 될 공산이 크다. 이 사이 이스라엘과 이슬람 각 세력이 엉켜 싸우면서 지금까지와 같은 지역 내 혼란이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이란이 아브라함 협정 확대 논의를 봉쇄하기 위해 미국과의 종전 협상을 질질 끌면서 주변 친미국에 소규모 공격을 지속할 수도 있다.
중동의 혼란이 길어지면 한국은 외교적으로 곤란해진다. 미국이 중동에 발이 묶이면 중국 견제의 밀도는 떨어질 수 밖에 없고,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한국을 활용하겠다는 방안이 더욱 구체화할 게 뻔하다. 최근 문제가 된 제이비어 브런슨 주한미군사령관의 “한국은 중국을 겨누는 단검” 발언은 개인 견해가 아니다. 워싱턴DC의 기득권 정치인과 외교·국방 관료들의 대체적인 인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제적으로도 유가 불안과 중국의 경제보복 리스크 등을 안아야 한다.
이란 전쟁이 끝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거란 희망은 섣부르다. 중동에서 새로운 불안의 바람이 불어온다. 국가든 기업이든 개인투자자든 혼란 장기화에 대응할 방안을 미리 준비해 두어야 한다.
부국장 겸 IT과학바이오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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