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중동 국가들을 향해 ‘아브라함 협정’을 다시 꺼내 들었다. 표면적으론 중동 평화를 실현하겠다는 구상이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지 않다. 이제 중동은 ‘아브라함 협정’ 하나로 묶일 만큼 단순하지 않다. 그 복잡한 갈등의 뿌리는 어쩌면 아브라함의 두 아들이 서로 다른 운명의 길을 걷기 시작한 때까지 거슬러 올라갈지 모르겠다.
◆아브라함의 두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
히브리인 족장 아브라함에게는 아들이 두 명 있었다. 한 명은 이집트 출신 여종 하갈에게서 태어난 이스마엘, 다른 한 명은 아내 사라가 낳은 이삭이다.
성경에 따르면 사라는 오랫동안 아이를 낳지 못하자 자신의 여종 하갈을 남편 아브라함에게 보낸다. 그렇게 태어난 첫째 아이가 이스마엘이다. 당시 아브라함의 나이는 86세였다. 그런데 사라가 기적처럼 이삭을 낳았다. 그때 아브라함은 100세, 사라는 90세였다. 인간적으로는 후손을 기대할 수 없는 나이였다.
사라는 아들을 낳자 아브라함에게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고 요구한다. 아브라함은 크게 괴로워했지만 결국 하갈과 이스마엘을 광야로 내보낸다.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떡 한덩어리와 물 한 가죽부대뿐이었다. 곧 물이 떨어졌고, 울부짖는 이스마엘을 지켜보면서 하갈은 통곡했다. 그때 하나님은 하갈의 눈을 밝혀 샘을 발견하게 만든다. 이슬람은 그 샘이 바로 메카의 ‘잠잠 우물’이 되었다고 믿는다. 하갈과 이스마엘은 그곳에 정착했고, 훗날 이스마엘의 후손 가운데 예언자 무함마드가 태어났다고 여긴다. 오늘날 전 세계 수백만 무슬림이 메카 성지순례(하지) 때 사파 언덕과 마르와 언덕을 일곱 번 오가는 의식은 목마른 아들을 살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물을 찾아 헤매던 하갈의 절박한 걸음을 기념한 것이다.
반면 유대 전통에서 이삭은 ‘약속의 아들’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질 것”이라고 약속했고, 그 약속은 이삭이 태어남으로써 이뤄졌다. 그런 귀한 아들을 하나님은 변제로 바치라고 명령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모리아산 제단 위에 눕히고 칼을 든다. 그 순간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 아브라함을 멈추게 하고 숫양 한 마리를 대신 제물로 내어준다. 유대인들은 이를 ‘아케다’(이삭의 결박)라고 부르며 중요한 신앙의 기억으로 간직한다. 유대 새해 명절인 ‘로쉬 하샤나’ 때 숫양의 뿔로 만든 나팔 ‘쇼파르’를 부는데, 이는 모리아산의 숫양을 상징한다. 유대교·기독교는 이삭을 신앙적 조상으로 여긴다. 이삭의 가문에서 예수가 탄생했다.
그래서 유대교·기독교·이슬람은 모두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한다. 이를 보면 중동의 역사는 한 조상에게서 갈라져 나온 형제들의 길고 긴 불화일 수 있다. 아브라함은 세 종교가 함께 떠받드는 공통의 조상이지만 현실의 중동은 여전히 ‘형제들의 화해’와는 거리가 멀다.
◆형제들의 다른 셈법
최근 중동 외교의 키워드로 ‘아브라함’이 등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추진하는 ‘아브라함 협정’ 때문이다. 아브라함 협정은 2020년 트럼프 1기 행정부의 중재로 아랍에미리트(UAE)·바레인·모로코·수단이 이스라엘과 외교 관계를 정상화한 협약이다.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이 선행돼야 한다는 아랍 세계의 원칙을 깨고 성사됐다는 점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이를 자신의 최대 외교 성과 가운데 하나로 내세워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이란과의 종전 협상 과정에서 다시 아브라함 협정을 꺼내 들었다. 그는 지난달 사우디아라비아·카타르·파키스탄·튀르키예·이집트·요르단 정상들과 통화하며 이란 종전 협상을 논의하던 중 느닷없이 아브라함 협정 가입을 요구했다.
트럼프가 중동 국가들에 아브라함 협정 참여 확대를 요구하는 배경에는 자신의 중동 외교를 ‘역사적 업적’으로 남기려는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다. 이란과의 협상 결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더 많은 중동 국가를 협정에 참여시킨다면, 자신을 ‘중동 평화의 설계자’로 포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대(對)이란 포위망 구축이다. 아브라함 협정 참여국이 늘어날수록 이스라엘과 친미 아랍국가들의 안보 협력은 강화된다. 이는 자연스럽게 이란을 견제하는 지역 질서로 이어진다. 국내 정치적으로는 미국 내 복음주의 기독교 세력과 친이스라엘 유권자들의 지지를 결집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인기 없는 이란 전쟁으로 잃은 점수를 더 큰 외교 이벤트로 만회하려는 전형적인 트럼프식 접근법이다
그러나 중동 국가들의 반응은 싸늘하다. 특히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는 격분한 것으로 알려졌다. 가자 전쟁과 이란 전쟁을 거치며 이스라엘에 대한 사우디 내 여론이 악화한 점이 그의 거부감을 키웠다는 분석이다.
흥미로운 점은 중동 내부의 균열이다. UAE는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더욱 강화해 아이언 돔 방공 시스템을 배치하고 공동방위산업 기금도 설립했다. 반면 사우디는 이란과 불가침 협정을 추진하고 있다. 동시에 튀르키예·파키스탄·이집트와 안보 협력을 확대하고 있다. 같은 수니파 중동 국가들조차 더 이상 하나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이다. 과거 중동이 ‘아랍 대 이스라엘’ 구도였다면 이제는 국익을 앞세워 서로 다른 계산법으로 움직이는 다극 체제로 변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세 종교가 공유하는 공통의 조상이다. 서로 다른 신앙과 전통을 가졌지만 출발점은 하나였다. 그럼에도 오늘의 중동은 화해보다는 갈등의 언어에 더 익숙하다. 여전히 종교와 역사, 석유와 안보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게다가 중동은 이미 과거의 단순한 ‘아랍 대 이스라엘’ 구도를 벗어났다.
이런 현실이라 트럼프 대통령이 추진하는 ‘아브라함의 중동’은 쉽게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 ‘아브라함 협정’이 진정한 의미를 가지려면 적대의 정치가 아니라 공존의 정치가 뒤따라야 한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서로를 원수가 아닌 형제로 바라보는 날, 비로소 협정은 완성될 것이다.
박영서 논설위원(pys@dt.co.kr)실시간 주요뉴스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