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운동가 에린 브로코비치, AI데이터센터 타깃

전력, 지하수, 소음 대책 없이 추진하는 데 경종

건설 과정 '비밀주의'를 새로운 사회 문제로 제기

데이터센터 자체 반대 아냐, 공개 협의할 것 주장

이규화 대기자
이규화 대기자

미국 환경운동가 에린 브로코비치가 이번에는 인공지능(AI) 산업의 심장부인 데이터센터를 겨냥하고 나섰다.

에린 브로코비치(사진)는 1990년대 캘리포니아주 힝클리 지역의 지하수 오염 사건을 추적해 거대 전력회사 PG&E를 상대로 승소를 이끌어냈고, 이 내용이 할리우드 영화화 돼 배우 줄리아 로버츠가 연기하면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이후 '에린 브로코비치'는 환경운동의 대명사 중 하나가 됐다.

에린 브로코비치. 에린 브로코비치 인터넷 홈페이지 캡처
에린 브로코비치. 에린 브로코비치 인터넷 홈페이지 캡처

그런 그가 이제 AI 데이터센터 건설 과정의 '비밀주의'를 새로운 사회 문제로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미국 IT전문매체 테크크런치는 최근 '에린 브로코비치 데이터센터 비밀주의를 겨냥하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브로코비치가 미국 전역의 데이터센터 건설 현황과 주민 민원을 추적하는 온라인 플랫폼을 개설했다고 보도했다. 이 플랫폼에는 미국 전역의 데이터센터 위치가 지도 형태로 표시되며, 주민들이 직접 자신이 겪고 있는 피해나 우려 사항을 제보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브로코비치가 문제 삼는 핵심은 데이터센터 자체보다도 건설 과정의 불투명성이다. 그는 많은 지역사회가 대규모 데이터센터 계획을 사전에 충분히 알지 못한 채 사업이 추진되고 있으며, 지방정부와 기업들이 비밀유지계약(NDA) 등을 이유로 주민들에게 상세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그는 최근 인터뷰에서 "주민들은 자신들의 지역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에서 배제되고 있다고 느낀다"며 "프로젝트가 비밀리에 밀어붙여지고 있다는 분노가 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의 문제 제기가 주목받는 이유는 AI 산업이 전례 없는 속도로 데이터센터를 증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성형 AI 경쟁이 본격화되면서 미국의 빅테크 기업들은 수십억 달러를 투입해 초대형 데이터센터 건설에 나서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시설이 막대한 전력과 물을 소비한다는 점이다. 특히 AI 연산용 서버는 기존 데이터센터보다 훨씬 높은 전력 밀도를 요구하며, 이를 냉각하기 위해 대량의 물과 전기가 필요하다. 이에 따라 일부 지역에서는 전력요금 상승, 수자원 부족, 소음 증가, 토지 가치 하락 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 때문에 미국 전역으로 데이터센터에 대한 님비(NIMBY)현상이 확산하고 있다.

브로코비치가 운영하는 사이트에는 이미 수천 건의 주민 제보가 접수됐다. 텍사스를 비롯한 여러 주에서 데이터센터의 물 사용량, 전력 소비, 소음 문제 등에 대한 신고가 이어지고 있으며, 그는 이를 통해 데이터센터 산업의 환경적·사회적 비용을 가시화하겠다는 목표를 내세우고 있다. 현재 사이트에는 수천 개의 데이터센터 정보와 수천 건의 주민 민원이 축적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논란은 환경 이슈를 넘어 AI산업의 성장 방식 자체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으로 확산되는 양상이다. 미국에서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데이터센터가 '첨단산업 투자'와 '일자리 창출'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AI 붐이 본격화되면서 데이터센터가 지역 전력망과 수자원에 미치는 부담이 커지자 일부 지역에서는 건설 반대 운동이 조직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실제로 여러 지방정부가 신규 데이터센터 허가를 일시 중단하거나 재검토하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브로코비치가 데이터센터를 전면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이다. 그는 AI 기술의 발전 자체를 부정하기보다 주민들이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고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즉 "데이터센터를 짓지 말라"가 아니라 "무엇이 건설되고 있으며 지역사회가 어떤 비용을 부담하게 되는지 투명하게 공개하라"는 요구에 가깝다.

이러한 움직임은 최근 유럽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데이터센터의 에너지 사용량과 물 소비량 공개를 둘러싸고 투명성 논쟁이 벌어지고 있으며, 일부 시민단체와 연구기관들은 관련 정보가 산업계의 로비로 지나치게 비공개 처리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데이터센터가 AI 시대의 핵심 인프라로 자리 잡으면서 이제는 반도체나 서버 성능뿐 아니라 그 시설이 소비하는 자원과 환경 비용까지도 공적 검증의 대상이 되고 있는 셈이다.

결국 브로코비치의 새로운 캠페인은 AI를 둘러싼 논쟁이 기술 혁신의 영역에서 사회적 수용성의 영역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과거 산업화 시대의 갈등이 공장 굴뚝과 화학물질을 중심으로 전개됐다면, AI 시대의 갈등은 데이터센터와 전력망, 냉각수와 지역사회 참여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다.

AI 혁명이 계속될수록 데이터센터는 더욱 거대해질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브로코비치의 문제 제기는 "얼마나 많은 AI를 만들 수 있는가" 못지않게 "누가 그 비용을 부담하는가"라는 질문이 앞으로 더욱 중요해질 것임을 시사한다. AI 시대의 새로운 환경 논쟁이 이제 막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이규화 대기자 david@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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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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