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을 밈(Meme)으로 소비하는 야만의 시대
죽음을 진영의 놀잇감으로 삼은 빈곤한 정치문화
극단적 혐오 커뮤니티, 표현의 자유 아닌 차단대상
권력의 ‘선택적 애도’ 멈추고 보편적 기준 세워야
고대 그리스 비극 『안티고네』에서 주인공은 반역자의 장례를 금지한 왕의 명령을 정면으로 어기고 오빠의 시신을 거둔다. 산 자의 권력이 아무리 거대해도 죽은 자의 존엄을 짓밟을 수는 없다는 인류의 오랜 불문율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안티고네의 선택이 증명하듯 죽은 자를 대하는 태도는 야만과 문명을 가르는 최후의 척도다. 표현의 자유를 그토록 신봉하는 서구 사회가 홀로코스트의 비극이나 9·11 테러를 결코 밈(Meme)으로 소비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비극을 희화화하는 순간, 공동체를 지탱하는 윤리적 토대 자체가 붕괴한다는 것을 뼈아픈 역사적 경험으로 체득했기 때문이다.
최근 스타벅스코리아의 '5·18 탱크데이'와 '책상에 탁' 마케팅 논란은 이 최소한의 금도(襟度)가 한국 사회에서 얼마나 무참히 무너졌는지 보여준다. 음지에서나 뒹굴던 조롱 밈이 글로벌 브랜드 내부의 여과망을 버젓이 통과했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통찰처럼 진정한 악은 뿔 달린 괴물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상상하지 못하는 텅 빈 머리, 즉 '사유의 불능(Inability to think)'에서 온다. 그 잔인한 연원을 모른 채 낄낄대며 기획안에 도장을 찍은 빈곤한 인식이야말로 이 비극의 진짜 실체다.
더욱 기괴한 장면은 기업이 사과하고 물러선 자리에 난입한 정치권에서 연출됐다. 국민의힘 일부 인사들은 "내일 스벅 들렀다 출근해야지"라며 보란 듯이 조롱성 인증샷을 올렸다. 타인의 피와 고통이 묻은 희화화를 제1야당 인사들이 나서서 이른바 '쿨(Cool)한 우파의 인증 마크'처럼 앞다퉈 소비한 것이다.
한국 보수가 정의나 보편적 선(善) 같은 거대 담론의 프레임 전쟁에서 매번 진보 진영에 처참하게 밀리는 본질적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헌법 전문과 법 조문에 새겨진 국가폭력의 희생(4·19, 5·18)조차 껴안지 못할 만큼 공동체적 윤리가 텅 비어있음을 스스로 자백하고 있으니 도덕적 헤게모니를 쥘 수 없는 것은 필연이다.
혐오의 유희는 반대편의 죽음 앞에서도 멈추지 않는다. 노무현 전 대통령 17주기 추도식장에는 일베(일간베스트) 상징 손가락 인증이 등장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혐오 사이트 폐쇄를 거론하자 어김없이 '표현의 자유' 논쟁이 불붙었다.
이 논쟁은 사이트 차단 여부를 넘어선 기본 윤리의 문제다. 타인의 죽음을 조롱거리로 소비하는 극단적 혐오 커뮤니티는 아렌트가 경고한 그 '사유의 불능'을 대량 생산하는 공장과 같다. 이들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인간 존엄과 문명의 DNA 자체를 파괴한다. 이 악의적인 유통망을 차단하는 것은 헌법이 금지한 억압적 검열이 아니다. 공동체의 정신을 갉아먹는 치명적 바이러스를 막아내는 국가의 단호하고 마땅한 '사회적 방역(防疫)'이다.
다만 이 방역의 칼날이 완벽한 정당성을 얻으려면 철저히 보편적 기준 위에 서야 한다. 권력의 '선택적 애도'를 멈춰야 한다는 뜻이다. 최근 경기 포천에서 야간 훈련을 받던 20대 동원예비군 청년이 쓰러져 숨졌다. 국가의 부름에 응했다가 목숨을 잃은 명백한 공적 희생이다.
만약 정치가 내 편의 상징적 죽음에는 권력을 동원해 분노하면서, 표가 되지 않거나 정부에 부담이 되는 죽음 앞에서는 침묵하거나 조롱한다면 대중은 애도의 진정성을 비웃게 된다. 권력이 애도를 선택적으로 하는 순간 대중 역시 죽음을 자기 입맛에 맞춰 조롱거리로 소비하는 악순환이 싹튼다.
인간의 죽음은 진영 결속을 위한 땔감이나 유머의 소재가 될 수 없다. 정치가 해야 할 일은 내 편의 분노만을 대리 집행하는 얄팍한 쟁투가 아니라, 붕괴된 인간 존엄의 금도를 바로잡을 보편적 애도의 기준을 세우는 일이다. 혐오 산업의 젖줄은 단호히 차단하되 이 땅의 모든 희생에는 진영을 가리지 않고 동일한 무게의 예의로 응답해야 한다.
김윤정 기자 kking152@dt.co.kr
실시간 주요뉴스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