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 AP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 AP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중동 외교 구상의 핵심 카드로 내세워온 ‘아브라함 협정’ 확대 전략이 사우디아라비아와 파키스탄의 강한 반발에 직면하고 있다.

특히 사우디 실권자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미국의 거듭된 압박에 격한 불만을 드러낸 것으로 알려지면서, 트럼프 행정부가 추진하는 중동 질서 재편 구상에도 적지 않은 부담이 될 전망이다.

영국 더타임스는 26일(현지시간) 트럼프 대통령이 최근 중동 주요 정상들과의 통화에서 이스라엘과의 관계 정상화를 골자로 한 ‘아브라함 협정’ 참여를 재차 요구했으나, 빈 살만 왕세자가 이에 강한 거부감을 표시했다고 보도했다.

아브라함 협정은 트럼프 1기 행정부 시절 미국의 중재 아래 아랍에미리트(UAE), 바레인, 모로코, 수단 등이 이스라엘과 외교 관계를 수립한 일련의 합의를 뜻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재집권 이후 사우디를 포함한 주요 중동 국가들로 협정 범위를 확대하는 데 외교적 역량을 집중해왔다.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이란 문제와 연계된 중동 외교 논의 과정에서 사우디 측에 관계 정상화 참여를 압박했다. 그러나 빈 살만 왕세자는 이를 사실상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거듭 강조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 외교 소식통은 더타임스에 “왕세자가 트럼프 대통령에게 ‘노’(NO)라고 수차례 말해야 하는 상황 자체에 크게 격앙돼 있었다”고 전했다.

빈 살만 왕세자는 비교적 실용주의 성향으로 평가받으며 과거에는 팔레스타인 문제를 절대적 우선순위로 두지 않는 인물로 인식돼 왔다. 실제로 조 바이든 행정부 시절 사우디는 미국과의 방위 협력 강화를 조건으로 이스라엘과의 관계 정상화를 검토한 바 있다.

당시 미국과 사우디, 이스라엘 간 협상이 상당 부분 진전을 이뤘으나,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팔레스타인 국가 인정 문제에 대해 명확한 약속을 거부하면서 최종 타결에는 실패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도 사우디는 이스라엘과의 국교 정상화를 위해서는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 수립과 관련한 구체적이고 되돌릴 수 없는 로드맵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반면 이스라엘은 이에 부정적 태도를 고수하고 있어 양측 간 간극은 좁혀지지 않고 있다.

특히 가자지구 전쟁과 최근의 이란 관련 군사적 긴장 이후 중동 지역 내 반이스라엘 정서가 급속히 확산되면서 사우디 지도부 역시 강경 기조를 강화한 것으로 분석된다.

더타임스는 이란 문제가 중동 안보의 위협이라는 점을 재확인시키는 동시에, 이스라엘 역시 미국을 지역 분쟁으로 끌어들이는 불안정 요인이라는 인식을 중동 사회에 확산시키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영국 싱크탱크 채텀하우스의 사남 바킬 중동·북아프리카 국장은 트럼프 대통령의 접근 방식에 대해 “전형적인 트럼프식 압박 외교이지만 현재 중동 분위기를 제대로 읽지 못한 요구”라고 지적했다.

사우디와 긴밀한 군사 협력을 이어가고 있는 파키스탄 역시 미국의 요구에 선을 긋는 모습이다. 카와자 아시프 파키스탄 국방장관은 최근 현지 방송 인터뷰에서 “국가의 근본 이념과 충돌하는 어떤 협정에도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 밝히며 사실상 아브라함 협정 참여 가능성을 일축했다.

그는 또 1967년 이전 국경선을 기준으로 한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수립 전까지는 이스라엘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기존 입장을 재확인했다. 아시프 장관은 인터뷰에서 “신뢰할 수 없는 상대와 협상 테이블에 앉을 수 없다”며 이스라엘에 대한 강한 불신도 드러냈다.

인도 매체 NDTV는 아시프 장관이 파키스탄 내 대표적인 반이스라엘 강경파 정치인 가운데 한 명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최근에도 이스라엘을 강도 높게 비판하며 가자지구 군사작전에 대해 “집단학살”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바 있다.

중동 전문가들은 트럼프 행정부가 사우디를 아브라함 협정 체제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할 경우 중동 외교 지형에 결정적 변화가 가능하다고 보면서도, 현재의 전쟁 국면과 악화된 여론 환경에서는 현실적 돌파구를 찾기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규화 대기자(david@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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